기운이 처지기에 간단히 배낭을 꾸려 산을 향해 나섰다. 몸이 시름 거릴 때 적당히 산 기운을 쐬고 나면 기분이 한결 되살아난다. 아무래도 산이 수혈을 해주는 모양이다. 완만한 능선으로 한두 시간 정도만 걸을 생각이었는데 산의 손짓에 취해 제법 많이 걸었다. 겨우내 마른 장작을 세워놓은 듯하던 산은 바야흐로 신록이다. 나무는 어떻게 한 몸에서 죽음과 삶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어떻게 수십 수백 살을 살아도 나무는 늘 그 몸에서 경이로운 새봄을 틔어 내는 것일까. 신록의 산은 지금 생명으로 충만하고 나는 그 생명에 도취되어 발걸음을 떼고 있다.
산에 안기는 걸 나는 퍽이나 좋아한다. 산에만 들면 그와 교접交接하고 싶은 강열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흙과 바위와 나무와 풀과 그리고 그 사이를 휘젓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바람의 넋과..... 산에 들면 나는 산 짐승처럼 몸을 뉘어 전신으로 그의 살과 닿기를 희망하며 마침내 코를 묻곤 하는 것이다.
도봉산의 보문능선으로 해서 우이암을 찍고, 다시 주능선을 타고 주봉까지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성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저만치 앞서가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 왔다. 내 걸음이 빨라 선가 이내 서로의 거리가 3미터 남짓 좁혀들었다. 그는 곡명을 알 수 없는 음악을 들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산에선 산이 들려주는 소리만이 듣기가 좋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하기에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는 좀 짜증스러워 얼른 추월해 버리는데, 이번엔 노폭이 좁고 경사를 이루어 나도 모르게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비켜드릴까요?” 한다. “나는 아니, 그냥...”하며 얼버무렸다. 나의 이 태도는 순전히 그의 예의 바르고 순한 음성으로 인한 돌방상황인 셈이었다. 그는 주춤한 자세로 어느 등산로에서 오는 중이냐고 묻더니, 자기는 냉골에서 시작하여 와이 계곡과 신선대를 거쳐 오는 길이라고 한다. 도봉산이라고 하면 나도 웬만큼은 꿰고 있는 사람이다. 그 정도라면 도상 거리러 보나 난이도로 보나 산 깨나 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주봉 쪽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묻지도 않은 자기애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퇴직한 후론 거의 매일 산에 온다고, 아내가 교사라 파출부가 오는데 오늘은 파출부가 아침 일찍 오는 바람에 집에 있기 뭣하여 나왔노라고, 작년 여름엔 만장봉과 신선대를 등반하다가 벼락을 만나 죽는 줄 알았다고, 몇 차례 다리를 다친 적도 있다고, 어제도 북한산 등반을 빡세게 했노라고. 허구한 날 지치도록 산을 찾는 다면 혹 남모를 고뇌라도 있는 것일까. 인생의 하산 길, 직장과 가정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다 어느 날 불현듯 멈춰버렸을 때 죽고만 싶었다는 퇴직 남성의 고백을 들은 적도 있어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얼결에 내 입에서 훈수가 나왔다. 너무 무리한 산행을 하는 것 같다고, 여름엔 뇌우가 잦아 암벽을 타는 것 보다 중턱쯤만 올라와 편히 쉬다 가거나 책을 읽는 것도 좋다고. 그가 다시 멈칫하며 웃는다.
“아, 문학소녀시구나. 저는 56년 생인데 선생님은 저보다 몇 살 아래지요? 제가 좋은 시 하나 읊어드려도 될는지요?”
시를 읊어? 황당하고 귀엽네. 어린애고 어른이고 귀염성이란 사람을 흡입한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맞는지는 몰라도 선생님이 제 아래 동생뻘이 되실 것 같은데,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해서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뭐라고? 이사람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곧 이어 그가 “비시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했을 때야 비로소 그가 무슨 시를 읊기는 했나보다 싶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시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하아, 이거요? 제가 좋아하는 시에요. 이런 건 똑바로 서서 상대방을 응시하며 들려드려야 하는 거니까 제가 다시 읊겠습니다.”
웃기는 사람이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모자의 챙을 아래로 바짝 내리 당겼다. 그는 짓궂게도 자기 고개를 낮춤과 동시 정면으로 나를 응시하며 잽싸게 내 동공을 기습했다. 번개 작전에 그의 얼굴이 내 시야에 아주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동안童顔의 선량한 인상이었다.
나는 걸음을 더욱 재게 놀렸다. 발밑에서 연신 뽀얀 흙먼지가 풀썩거린다. 흙먼지가 신경 쓰여 나는 속도를 조금 늦추어 보았다. 그도 내 보폭을 맞추는 것 같은 것이 함께 걸으려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러면서 다시 느릿하게 말을 건네었다.
“저도....누군가에게...기대고 싶어집니다. 그럴 사람을 찾고 있어요. 혹시....제가... 기대고 싶다는 말씀을..드린다면 ....그건 제가 갱년기이기 때문일까요?”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선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안단테(Aandante)로 다가오는 그에게 나는 알레그로(Allegero)로 한 방 날렸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근데, 산에게 기대세요.”
“산에요.?”
“네, 산에요.”
“선문답 같군요.”
“나무에게 기대면 어쩌다 같이 쓰러질 수도 있잖아요.”
할 말을 마친 나는 걸음을 곱절로 빨리 했다. 어느 덧 등산로 초입의 약수터까지 왔다. 나는 관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양손으로 받아 몇 차례 목을 축였다. 땀에 젖은 산행 끝의 물맛은 세상에서 가장 달다. 내 뒤를 줄 곧 따르던 그 남자 역시도 바가지를 잡으려다 말고 나처럼 양손으로 물을 받는다. 물을 다 마신 그는 두어 걸음 물러서 있는 것이 나를 기다리는 듯 했다. 나는 일부러 물을 더 마셔가며 시간을 끌었다. 하산 인파가 몰리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약수터로 몰려들었다. 그는 이내 숲에 묻힌 노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접속했다. 시의 출처를 찾고자 검색란에 ‘비스듬히’라고 쳐 보았다. 정현종의 시가 떴다. 비빔밥 같았던 시를 이번엔 정독했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선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해서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흘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름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정현종의 시 <비스듬히>
이런 시였구나. 나는 그 비스듬히를 받쳐주지 못했다. 실은 나도 비시듬히, 허나 나는 비스듬히를 기대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아무도 누군가를 완벽히 지탱해줄 수가 없음을 안다. 이제 나는 그 불완전을 인내하고 포용할 마음이 일지 않는다. 나무와 나무처럼 그저 일정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남녀의 사랑이란 그 과정과 끝이 대게는 비슷한 게 아닐까. 마주침과 설렘, 얼마간의 탐색과 흥분, 두 존재가 주는 그리움과 유열, 이들이 꽃을 다 피우고 나면 마침내 환상은 한 잎 두 잎 낙화되어 뒹굴고, 이어지는 나른한 허무와 환멸, 그리고 타성. 산에게 기대란 말은 나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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