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수영으로 해서 생긴 일이었다. 뒷문 밖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집에서 하루 종일 물장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관계로, 초등생이 된 뒤엔 남대천에 가서 자연스럽게 헤엄을 치며 놀았다. 누가 가르쳐줘서 헤엄을 친 게 아니라, 물을 좋아하다 보니 물이 헤엄을 가르쳐준 셈이었다. 중학교 때는 천방둑을 따라 걸어서 바다에 이르렀고, 파도를 타는 수영을 즐겼다. 미치도록 좋아하니, 파도가 메다꽂는다 해도 수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사범학교 2학년 때 수영선수로 뽑혀 경포 바다에서 연습에 돌입한 첫날이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선생님이 바다에 떠 있는 부표를 돌아오라고 시켰다. 호루라기 소리에 물에 뛰어든 선수는 여섯 명이었다. 신호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다 보니, 그 물은 내가 잘 알고 친해온 그 물이 아니었다. '아, 선수가 된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물하고 노니는 것이 아니라 물은 그냥 수단일 뿐 사람하고 경쟁을 하는 것이 선수구나'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수영하는 것이 싫어졌다.
아니, 그런 식으로 수영하는 것은 싫었다. 부표를 돌아 출발점에 꼴찌로 도착한 나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너는 이제 훈련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또 한 번은 임용고시에서였다. 내가 졸업하던 해부터 사범학교를 졸업해도 임용고시를 거쳐야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추상같이 엄한 시험관들 앞에서 유희하기를 거부하고 뻣뻣이 서 있었던 것이다. 시험관 중 한 분이 나에게 기회를 더 주려고 풍금 반주를 다시 부탁했는데, 나는 여전히 유희를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그때의 상황으로는 무모한 고집이었다. 두 달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가족 중 누군가 돈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기에서 빵점을 받고, 나는 사범학교 역사에서 발령을 받지 못한 극히 드문 몇몇 졸업생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나 때문에 '남우세스러워 고향에 있을 수가 없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수영장이란 곳을 처음 찾아가게 되었다. 목욕탕보다 조금 큰 풀이 네 개의 라인으로 나뉘어 있어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잠시 후에 보니 똑같은 수영복 차림의 소녀들이 트레이너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는데, 트레이너가 어떻게 하면 속도를 높일 수 있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었다. 물을 겨우 속도 경쟁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현장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수영을 하면서도 물과 노닐고 일체가 된다는 것이 뭔지 모르고 있구나, 이런 사람들을 바다에 집어넣으면 금방 두려움에 사로잡히겠구나. 왜냐하면, 물의 인력과 불규칙한 흐름 중에도 어떤 규칙적인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하면 수영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장난감 같은 물에 라인을 쳐놓고 속도 경쟁을 해서 1등, 2등을 가려서 어쩌겠다는 건가. 겨우 1, 2등을 자부심으로 여긴단 말인가. 그런 시각에서 보니 도시인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라인을 쳐놓고 그 줄로만 따라가려 하고, 그 목표는 1등을 하려는 것과 똑같은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삶에 무슨 라인이 있겠는가. 라인 밖에서 유유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은 자기 최면에 갇혀 세팅된 삶을 살도록 조정하는 거짓 인식에 잡혀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삶의 지혜란,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라인을 걷어내 물을 물로 느끼는 것, 물속에서 물고기가 그렇듯 그저 지느러미를 잘 작동하는 것, 그것이면 다가 아닌가. 폭풍우 치는 바다라 해도, 그 무시무시한 깊이와 요동치는 큰물의 에너지에 대해, 두려움 없는 신뢰와 파도에 자기를 맡기는 비법은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지느러미에 있다는 것. 이렇게 말하면,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낙천적으로 생각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보라.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1등 인물들, 여러 국가 기관과 기업의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회전문 인사(人士)들의 위기 대처 능력에서 드러나는 민낯을 보면, 그들이 기득한 것이란, 고작 경쟁을 이기기 위해 온갖 편법을 통한 술수에 의한 것이었으며, 대의도 명분도 허세였을 뿐, 평생 남을 의식한 삶에 갇혀 살아온 소인(小人)의 면모와 다르지 않다. 1등은 다만 저들을 가진 자로 만든 것뿐이고, 소유가 많다 보니 두려움이 커지고, 진실 앞에 비겁해지는 것이 아닌가.
동해안에서 태어나 수영을 통해 바다를 조금 안다는 것 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몇십만이나 된다는 취준생들에게 감히 한마 디 하라고 한다면, 인생에 라인은 없다. 따라서 경쟁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설사 한시적으로 남을 앞서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인생은 라인이 아니라 물이다, 물! 익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알지 않으면, 물은 항상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자(獅子)이다. 중요한 것은 1등이 아니라 사자의 등에 올라타고 포효하는 것이다.
서영은 / 소설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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