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장사에서 몇 해나 지났는지-그 새 어린것이 강보에 싸인 갓난애까지
셋이나 생겼다.
서울서 백여 리 떨어진 시골 농촌에서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하면서 영영
자립하던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하루 아침에 산산이 부서졌다.
6.25사변에 한 마을 청년 네다섯과 같이 끌려나간 채 1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소문으로 30리 밖 재 너머 언덕으로 찾아간 아내는
거기 총알에 꿰뚫려 쓰러진 송장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추기로 들면 한이 없다. 6.25의 피비린 희생이 어찌 이 한
가정뿐이랴. 여기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두 번 다시 그들 가족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막다른 외길, 그것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과연 죽음이란, 이별이란 그렇게
슬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 눈물, 그런 불행의 저쪽에 행복이란 것이 있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내세운 사람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이란 객관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는 것--제각기 제 주관 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천하가 다 내 것이면 행복할까? 전 세계의 미남 미녀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호화 찬란한 성찬보다도 주릴 때 먹는 보리밥 한 술-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내용의 문제요, 분량으로 판단할 것은 아닌 것 같다.
R씨의 초대로 저녁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R씨가 자기와는 친한 어느 부인네
한 분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겪어 온 중에서 어떤 때가 제일 행복했나요? 가장
행복이라고 생각되던 일이 뭔가요?"
동석했던 그 부인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서울 닿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남편의 손-' 그 이야기였다.
세 아이가 다 자라서 그 중 둘은 벌써 대학생이라고 한다. 거기까지
길러내면서 걸어 온 고생길.
어느 때는 길거리에 앉아서 떡장사도 했고,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옷가지와
양곡을 바꾸는 행상꾼 노릇이며 나중에 좀 자리가 잡힌 뒤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갖고 헌옷 장사를 하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 푼푼이 모은 돈을
떼어도 보았고-. 자식 셋에다 사는 보람을 걸고 격류를 거슬러 살아 온 그
고초 속에서도, 때로는 즐거운 일, 행복으로 느껴질 일도 전혀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그 날 그 찻간에서 느꼈던 행복만이
오직 하나 간직한 행복의 실체였다는 사실-무슨 외국 영화의 한 토막 같은
그날의 그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새기면서 나는 또 하나 딴 생각에 잠겼다.
-만일에 그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날의 그 '행복'이 과연
지금까지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을까? 젊어서는 그런 일도
있었더니라는 한낱 낡은 앨범의 한 장으로 그쳐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만인이 슬퍼하는 죽음-그 죽음으로 해서 경화되는 사모가 있고, 퇴색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죽음'을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손실보다는 죽지 않고 삶으로 해서 결과하는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많다.
김소운 (1907 - 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 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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