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 오탁번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읆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 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뜀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 계간『시와 표현』2012년 가을호
...........................................................
시를 쓰는 소설가도 있고 소설을 쓰는 시인도 있다. 소설가라고 시를 못 쓸 이유가 없고, 시인이라고 소설에 손대지 말란 법도 없다. 이광수, 황순원,·김동리, 박경리, 한승원, 황석영, 윤후명, 박범신 등 소설을 본업으로 하면서 시를 쓴 소설가들이 있으며, 한용운, 이상, 서정주, 고은, 오탁번, 정호승 등은 소설도 쓴 시인들이다. 지금은 ‘소설의 시대’라 그런지 소설을 겸업하고 나선 시인들이 줄을 이었다. 김승희, 김신용, 하재봉, 김형수, 유용주, 박철, 최영미, 김정환, 장석주, 이대흠, 정철훈, 김선우 등이 장르를 넘나드는 멀티 문인들이고, 성석제, 장정일, 김형경, 공지영, 김연수, 이명랑 등 소설가들은 시로 먼저 등단을 했었다.
시인들이 소설을 쓰는 데에는 문학적 성취욕구 말고도 대중성과 상업성이라는 유인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까놓고 말하면 돈이 되겠다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소설가가 시를 쓰겠다고 나서는 것은 사뭇 다른 이유이다. 시는 말하자면 문학의 본향, 정서의 본향과도 같은 일종의 근원적인 그리움이 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김동리 선생은 미당에게 퇴박을 맞았을까.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다와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의 차이에서 보듯이 소설은 소통이 중요하지만 시에서는 꼭 전달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상력을 밑천으로 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시적인 상상력은 소설처럼 논리성을 적극 요구하지는 않는다.
필요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엉뚱한 상상력의 활달한 전개를 더 쳐주기까지 한다. 언어의 미학을 훼손하면서까지 애써 말의 연결을 매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당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오청에서 무릎을 탁 쳤던 것이다. 발레리는 산문과 시의 차이를 보행(步行)과 무용(舞踊)에 비유했고, 청나라의 한 문인은 그 차이를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에, 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에 비유했다. 밥은 쌀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술은 쌀의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변하여 전혀 다른 맛을 낸다는 차이가 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술을 마시면 취한다. 거대담론이 사라진 요즘은 시든 소설이든 사소한 스토리텔링이 개입되지 않은 작품이 드물지만 시는 가슴에 호소하여 취하게 하는 장르인 것만은 확실하다.
권순진
출처 :문학과 빛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 장미향기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0) | 2016.02.13 |
---|---|
한하운의 파랑새/ 김동근 (0) | 2016.02.13 |
세월이 가는 소리 / 오광수 (0) | 2016.02.10 |
면벽의 유령/안희연 (0) | 2016.02.09 |
아버지의 귀로/ 문병란 (0) | 201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