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마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한 이십전년쯤 될까 . 나는 그무렵 등단을 한 뒤 시를 공부하고 있었다. 문학의 밤, 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행사가 있었는데 장소는 내가 살던 울산의 바닷가 커다란 카페였다. 그날 나와 또 한 문우와 함께 주어진 소임은 손님에게 인사를 하면서 방명록을 받는 일이었다. 많은 문인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그런데 문학의 밤이 시작될 무렵 허겁지겁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 대충 차려입은 점버 차림의 사내는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아가씨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던지면서 급하게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헌데 방명록에 쓴 그의 이름에 나는 뭔가 찌르르한 자극을 받았다. 그는 송재학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한창 시 쓰는 재미에 빠져 있었으므로 나는 송재학 시인을 동경했던지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가 나를 미치게 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급하게 스쳐갔던 짧은 바람이 내 마음에 크게 공명해왔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홑치마 같은 풋잠, 풋것들은 여리고 아름답다. 홑치마는 몽환적이며 신비롭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반투명한 홑치마로 나는 혼자 상상해본다. 그 아련함이여. 게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와 풋잠이라는 단어가 아롱아롱 어지럽게 너울거리는데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라는 문장이 결합하였으므로 울컥해지면서 나는 눈물이 났다. 더구나 그가 내 얼굴을 만질때 치차향이 수로를 따라왔다니 ... 몽환같은 시어에 그의 체향이 치자향으로 중첩되면서 시에 대한 몽리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 젊은 시절 더 젊었던 시절부터 나의 결혼 생활은 잔인하게 불행했다.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그는 내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절대 그는 내게 휘파람을 불어줄 사람이 아니지만 만약 그가 휘파람을 내게 불어준다면 내 귀를 꼭꼭 막을 것이다. 그는 몇년전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
여름은 내게 늘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홧병이라서 뜨끈뜨끈한 날씨는 치명적이었다. 죽은듯 견디는 것. 생각없이 나태하게 연명하는 일. 어느날 딸이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냉장고가 텅텅비었다. 간장과 소금이 설탕이 식용류가 모두 바닥이났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참으로 무엇에 대한 의미없이 방구석에서 엎어져 지낸 것이다. 한심함을 자책하면서 장을 보았다. 하지만 햇빛 속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여름의 뙤약볕은 내게 독약일 수가 있으므로. 가끔 길에서 숨이 턱 막혀오고 , 어지러워 넘어지기도 한다.
한달전쯤인가 . 사업하는 지인과 시내 슈퍼앞에서 만나 오징어 한마리와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열려진 공간이었으므로 지인의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고 , 별로 중요치 않은 잡담이 오갔다. 그때 존재감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한남자를 보았다. 키도 훤칠하고 어디 하나 빠질데 없는 수려한 용모의 사내였다. 어찌어찌하다 전화 번호를 주고 받았다. 연하남인 그가 이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지인이 귀뜸해주었으나 나와 상관 없는 일. 그런데 연하남에게서 뜻밖에 연락이 왔다. 누나가 글쓰는 사람인데 맨날 방구석에서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자신과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자신은 혼자 가까운 곳을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데 둘이었으면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나이도 적고 지인의 친구이고 뭐 망설일게 있겠는가. 그로인해 대전 근교의 비경을 하나 둘 보면서 감동에 빠졌다. 그는 진중하면서도 낭만적이고 엉뚱한 위트로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강가에 놓인 조그만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누나 이제 막배가 끊겼으니 우리 여기서 자고 가야해. 두고 온 차가 있잖아? 여긴 말이지. 저녁이면 입구를 잠궈서 나갈 수가 없어.
그럼 일찍 나가야지. 그 말은 왜 안했어? 하하... 암튼 누나는 너무 순진해서 웃겨 죽겠어. 내가 장난을 친거야 . 장난. 이런식이었다. 어스름이 깔렸다. 메밀꽃처럼 만개했던 개망초도 옥수수도 산야도 어둠으로 덮여갔다. 산길은 굴곡이 심하여 내가 넘어지자 그는 내 손을 잡고 차분하게 이끌어갔다. 섬섬옥수같은 그의 손에 잡혔을 때 나는 남자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는 식사를 할때 음식을 내게 먹여주었다. 나는 그 느낌이 서툴고 감정이 미묘해졌다. 백수 아저씨처럼 살아가던 내가 아직 여자였나. 세상에 태어나 티비에서 그런 꼴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던 내가 이렇게 행복할수가 있다니. 남자는 길을 걸을때 서슴없이 내손을 꼭 잡았다. 내가 외려 당혹스러워 쩔쩔매었다. 왜, 내게 이렇게 잘해주나? 누나를 처음 밤거리에서 만났을 때 선마스마처럼 떠들고 있었지만 눈빛이 너무 슬퍼보였어. 내게도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대신 누나를 귀하게 여기고 싶어졌어.
그때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누나 , 왜 얼굴이 붉어져? 내가 그렇게 좋아? 나는 누나가 좋은데...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동생에서 갑자기 사내로 보이는 야릇하고 향기로운 이 느낌은 뭐지? 누나 , 우리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살다갔으면 좋겠어. 애들 다 커서 떠나면 사내가 강아지 한마리를 친구하면서 늙어간다는 게 슬프잖아.
이정도면 되었다 싶다. 철옹성 같은 내 가슴을 얼마간 뛰게 만든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카톡. 누나 , 왜 자꾸만 누나가 눈물나게 보고 싶지? 카톡. 이만하면 되었어. 사람의 끝을 본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야.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두렵다. 특히 편안한고 기분좋은 꿈을 꾸는 날이면 ... 짧은 시일내에 나는 한 남자를 알았고 꽁꽁 얼어붙어있던 심신을 순간 손과 얼굴의 따스한 감촉이나 아름답고 그윽한 미소, 내것이 될 수 없었던 행복을 느꼈다. 눈뜬 장님처럼 봉인된 채로 살아온 나에게 '어둠과 밝음이 되섞이는 이숲은 나비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이어지는 송재학 시인의 단어와 문장이 환각처럼 혹은 아름답고, 슬픈 꿈을 버무려 눈물을 폭죽처럼 치바치게 한다. 그러나 더큰 문제는 그가 내얼굴을 만졌다는 것이다.결코 눈뜨지 마라-그 것은 꿈과의 밀교이다. 봉인은 잔인하지만 얼마간의 것은 밀봉하고 나머지는 비운다는 것. 나는 결코 눈을 뜨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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