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의 초상
<한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최인호
참으로 이상하게도 쉰 살이 넘은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모양으로 '아, 별들의 고향의 작가시죠?' 하고 되묻곤 한다.
경아와 남주인공 문오와 함께 판잣집에서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희화화된 지 오래이고 지난 해 연말에는 TV에서 <별들의 고향>을 방영한다고 해서 어떨까 하고 보다가 5분 만에 닭살이 돋는 것처럼 쑥스러워서 TV를 꺼버린 적이 있었는데, 어쨌든 아직은 내 이름을 들으면 25년 전 내가 26세 때 쓴 처녀작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싫건 좋건 한 번의 인연이 평생을 지배하는 '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별들의 고향>은 내 평생이 낳은 하나의 업이다. 이제 와서 그것은 내게 있어 버릴 수 없는
유산이며 씻을 수 없는 나의 전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1967년 문단에 데뷔해서 <별들의 고향>을 쓴 1973년까지의 한 시기는 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젊은날의 초상'인 것이다.
1
오랜 전 대학 시절 나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라는 연극에서 신문팔이 소년역을 맡아 했었다. 이 연극은 지금도 내게 깊은 감동적 인상으로 남아 있다.
연극의 한 장면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어린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마다. 그녀는 무대감독을 맡아 하고 있는 상징적인 신에게 나는 이대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 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날로 한 번쯤 돌아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무대감독이 묻는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언제입니까?"
여인은 대답한다.
"내가 열 살 때의 생일이었어요."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대감독은 여주인공을 열 살 때의 어린 날로 보낸다.
장이 바뀌면 열 살 때의 생일 아침, 어머니는 딸의 생일날 준비에 부산을 떨고 있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어머님이 저처럼 새파랗게 젊으실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옆에서 붙잡아 끌어도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결국 여인은 행복했던 추억이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처럼 아름답다 해도 되돌려 재현시킬 수는 없다는 절대의 명제 앞에 깨끗이 과거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죽음에 승복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대학 시절에 공연했던 감명 깊은 연극의 한 장면 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가 하면, 이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무대역활을 자처한 또다른 나와 더불어 내 인생에 있어 처녀였던 <별들의 고향>을 쓸 무렵의 청춘의 계절로 함께 떠나 볼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2
내 고향은 서울이다.
나는 해방되던 그해 가을 서울 예관동에서 태어났으며,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울내기다.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이 전라도·충청도로, 간혹 고향에 내려 갔다 왔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서울을 줄곧 원수놈의 타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 유현종 씨는 이제는 완전히 촌사람 티를 벗어나고 서울 깍쟁이가 되었는데도 야구 구경을 갈 때면 눈을 부릅뜨고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승옥 씨는 한때 이 망할 놈의 서울, 서울, 이 웬수 놈의 서울을 주절대더니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낙향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에 돌아갈 고향, 위로받을 고향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솔직히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낙향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
나는 미록 서울 태생이었지만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북 평양에서 살아왔다. 아아, 그렇다면 나는 고향에도 갈수 없는 실향민이 아닌가.
그러나 서울도 역시 내가 태어난 고향이 아닐소냐.
그렇다. 나는 사대문 안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중구에서 태어난 서울 깍쟁이다. 서울은 그 동안 지방에서 이주해 온 촌놈들로 완전히 점령당하고 있다. 경우 바르고 체면 차리고, 냉수 마시고 이빨을 쑤실지언정 깍쟁이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서울내기로서의 면모는 거친 사투리와 지방색적 단결심으로 완전히 멸망되었다.
서울내기, 진짜 서울 깍두기의 모습은 요즈음 서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함께 골목에서 뛰놀던 깍쟁이 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마도 전국 팔도 가시네를 여편네로 삼아서 순수한 서울 피를 혼혈하고 있을 것이다. 순 서울산 재래종들은 점점 멸종되어 가고 교배 잡종들만 번창하고 있구나.
덕수국민학교, 서울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친 나는 그야말로 순금의 서울내기다. 살아온 것을 더듬어 보면 태어난 곳은 중구 예관동이요, 영희국민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이사간 곳이 지금 고려병원(현재 강북 삼성 의료원)자리의 평동 58의 2번지다. 내가 이놈의 번지를 어떻게 외고 있는가 하면 이놈의 집이 지금은 거대한 고려병원의 뒤뜰로 없어져버렸지만 아직도 내 주민등록증의 본적란 주소로 기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대문구 평동 58의 2는 내가 분명히 살아왔던 본적이었으되 지금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 않는 '환상의 집'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태어난 '생가'(이 거창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는 비록 형체는 남아 있으되 중구청 건너편 가구상들 중의 한집인 이 집은 지금 완전히 변모되어 있었다. 방이 많아 한때는 여관도 하더니 주인의 허락을 얻어 올라가 본 그 집은 이젠 완전히 아편굴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내가 아버님 앞에서 재롱부리며 놀던 방엔 못 쓰는 가구들만 그득하였으며, 변호사를 하던 아버님이 손님을 받던 응접실엔 쥐들의 똥만 무성했다. 철마다 보랏빛 꽃을 피우던 오동나무는 어디로 갔는가. 집 옆에 흐르던 개천은 복개로 덮이고.
그 당시 내 집은 멋진 집이었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려면 개천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와야 했었지. 아아, 어릴 때의 오동나무는 내 놀이터였었다. 나는 그 나뭇가지 위에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었지.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그 집에서 살았다.
누이들은 아직 처녀였으며, 형님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가. 그 집에 밤이 오면 우리는 아직도 살아 계신 아버님 앞에서 소프라노와 알토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지.
어제 불던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엔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그러면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었다. "우리 새끼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암, 제일이고 말고."
3
나는 어릴 때부터 현시욕이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어느 좌석에서건, 어떤 경우에도 나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기를 좋아하는 노출 증세가 있었으며 이중인격자였다. 정서적으로 미숙아였으며, 어떤 때는 쓸데없는 용기를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형편없는 겁쟁이였다. 신경질의 화신이었으며, 질투와 적의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성장한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로 자라났다.
나는 공격성이 강해서 나보다 강한 자, 권위적인 것, 위선적인 것, 질서나 규율에 관해 맹목적으로 도전하고 덤벼드는 기질을 타고났는데 그것은 우리집의 체질이었다.
나는 철저히 개인주의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형태든 조직은 싫어한다. 나는 조직은 어떤 형태든 광기에 젖어있다는 니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으며, 조직은 그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또 하나의 조직과 목적하는 바가 항상 같다는 비체제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나는 혼자이며 남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더러 의리가 강한 녀석이라고 가끔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수양을 쌓아서가 아니라 이기주의자로서 타인을 평가하는 약점 때문이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며 내가 남에게 간섭하기를 원치 않듯 나 역시 남에게 간섭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우리 동네에게 키 큰 녀석이건 작은 녀석이건 나를 건드리지 않고 경원하였던 것은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내가 서슬퍼렇게 가지고 있던 냉소적인 적의의 이끼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약하여 매를 두려워 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해수욕장에서 1시간 가량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나는 여하한 형태라도 (그것이 혁명이라는 미명을 붙이더라도) 폭력은 증오하고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자며 그래서 어떤 때는 쉽게 용서하지만 어떤 때는 쉽게 편견을 갖는다.
이런 복합적인 성격은 성장하여 획득한 것이 아니라 우리집 식구들은 누구든 가지고 있는 기질이었다. 평안도에서 자라난 우리집 기질은 성질이 급하며 눈물이 많고, 남을 잘 웃기지만 정이 깊지 않고 얕으며, 다정다감한 것 같지만 실은 비정하며, 통이 큰 것 같지만 실은 수전노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논리적이고 머리가 좋은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예술적인 기질을 타고난 상민의 딸이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함께 잤으며 새벽이면 아버지의 젖꼭지를 몰래 빨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녀석이 어머니 품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 보상을 아버지에게서 찾은 것이라 나는 짐작하고 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혼자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던 범인으로서, 변론을 맡으면 언제나 피고측에서 서서 눈물을 조금씩 흘리던 변호사로 유명하였다. 아버지는 한때 조만식 씨 휘하에 들어가서 정치 활동도 했지만 월남한 후 단순히 법조인으로만 처신하였다.
우리집 형제는 모두 독립성이 강하며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웃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학비를 벌었다. 우리집 형제들은 형제에 대한 우의가 깊으며 마피아 같은 혈맹으로 뭉쳐져 있다. 어릴 때부터 자기 것은 자기 스스로 처리 할 수밖에 없다는 훈련을 받아왔으며, 그 지독스런 가난을 겪은 탓인지 간혹 가난했었다는 과거를 소설로 미화시키는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조금쯤 아니꼬워진다.
가난에 대해 미화를 시킬 줄 아는 사람은 실제로 가난을 제대로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버스값이 없어서 몇 정류장쯤은 노상 걸어다녔고, 교복이 없어서(내 고등학교 때 별명은 걸레였다) 형이 입던 교복을 줄여 입고(우리집 남자들은 모두 같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점 의복비를 줄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다녔다. 양말은 늘 두 켤레였는데 그래서 아침마다 먼저 신은 사람이 임자였으며, 제일 나중에 신은 사람은 흥부네 자식 버선처럼 수천 번 기운 양말이었다. 언제나 게으른 나는 그 양말을 내 차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산은 하나였으므로 비가 오는 날은 늘 비를 맞고 걸어다녔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는 학교까지 비를 맞고 걸어가는 굴욕은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고등학교 근처에는 이화여고, 경기여고에 다니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녀들에게 비를 홀딱 맞고 걸어가는 내 꼬락서니를 보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우리들의 학비는 하숙을 치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새벽밥을 지었으며 하숙생들에게 밥상을 들여가는 것은 내 차지였다. 그들은 간혹 밥 속에서 어머니의 은빛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다음 식사 때 비싼 황금의 달걀을 반숙해서 상에 올리는 것으로 하숙생을 무마시키곤 했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집을 한 채 두고 가셨는데 변호사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보다 다른 사람에게 통이 큰 척 마음을 베푸는 위선자였으므로 유산이라고는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 아버님이 돌아가신 집이 바로 평동 집이다. 어제 불던 봄바람은 올 봄에도 불고 있지만, 이미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요 잔디밭도 어제의 잔디밭이 아닌 것이다.
형이 고등학교에 갈 때 우리는 아랫방을 세를 주었고, 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는 건넌방에 세를 주었다. 더 이상 세를 줄 방이 없으면 우리는 집을 팔아 이사를 갔다. 결국 우리는 한방에서 삼형제, 어머니, 누이가 함께 자야 했다. 윗목에선 언제나 자리끼가 꽁꽁 얼곤 했다.
형은 항상 형이라는 권위로 나를 이불 속에 먼저 들어가게 하곤, 내 체온으로 이불을 따스하게 녹여 주어야 들어오곤 했었다. 누구든 방에 불을 켜면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마루에 불을 켜고 방 문틈을 조금 열어 놓고 나는 꿇어 엎드려 글을 쓰고 형은 영어단어를 외곤 했다.
평동에서 살던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 북아현동 집으로 이사를 갔었다. 1959년에 이사를 간 우리는 이곳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다. 이곳에서 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을 했다.
몇 해 전 <월간조선> 기자와 이 집을 다녀오는 동안 딱 한군데의 집만이 눈에 익었다. 조그만 골목 네거리에 있는 <홍주약국>이란 간판이 그것이었다.
이 약국은 옛날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들러서 인사를 했더니 그때 주인은 아직 별로 늙으신 모습 없이 그 자리에 계셨다. 너무나 반가워하시는 그분은 내게 먹으라고 원비 두 병을 공짜로 주셨다.
"지금도 술 많이 마시쇼?"
약국 주인님은 내게 물었다.
그렇다.
그분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술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나를 우리 형제를 약국 유리창 너머로 줄곧 지켜보고 계셨었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군대에 입대하고, 휴가 맡아 나오고,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작가가 되던 과거를 약국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듯 샅샅이 기억하고 계셨다.
"아아, 기억납니다 최 형. 일요일이면 할머니(우리 어머니)가 술 깨는 약을 사러 오곤 했었지요. 언제나 세 병씩 사가지고 가셨지요.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깐요. 형님은 뭘 하시유?"
"대우의 사장으로 계십니다."
"동생은......"
"미국으로 이만갔지요."
"우리 오랜만에 냉면이나 먹읍시다. 이렇게 오랜만에 유명한 사람(?)이 모처럼 옛 동네에 왔는데 냉면이라도 한그릇 대접지 않으면 섭섭해서 어떻게 하지."
냉면을 사양하고 찾아간 북아현동 한옥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요즈음 날로 번창하고 있는 교회가 서 있었다.
내가 배를 깔고 없드려 글을 쓰던 안방은 주차장이 되어있었으며, 거넌방은 교회 뜨락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 다음 죽은 뒤에 아주 명망 있는 작가로 존경(?)받게 된다면 내 흔적을 찾는 문학도들은 어디에서 내 흔적을 찾을꼬 (그런 일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4
가난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리라 결정했으며, 국민학교 때는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었는데 나 때문에 덕수국민학교는 3연패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아 영원히 우승기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때 백일장의 작문
제목은 <오늘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 오는 길에 쥐를 밟았는데 그 쥐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레기통으로 도망가며 나를 노려보더라는 실존주의적 작문을 썼었다. 그것은 물론 낙방이 되었다. 그때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 최정희 선생님이었다.
"누나, 글 쓰는 사람 중에 구찌베니(립스틱) 빨갛게 칠한 사람이 누구냐?"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1958년 1월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문화란에 <어린이 차지>라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의 동시나 동요 같은 것을 실어 주는 작문교실이 있었다. 뽑힌 동요가 실리면 그 뒤에 짤막한 담당 기자의 작품평까지 실렸는데 당시 국민학교 다니는 꼬마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고정란이었다.
그 무렵 내 짝으로는 아버지가 동아일보에 다니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 아버지가 바로 그 <어린이 차지>란 작문교실을 담당하고 있으니 내가 동요 하나 지어 자기에게 주면 아버지에게 보여서 신문에 실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를 지었다.
<화롯가>
오손도손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우락부락 험상굳은 우리 형님손
매끈하고 백설같은 우리 누나손
장난쟁이 동생손은 까만 손이요
올망종망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놀다말고 한몫 끼운 동생 손이랑
험상궂고 보기싫은 손님 것까지
모두모두 모여있네 옹기 종기 화롯가
완성된 동요를 그 친구에게 넘겨 주고 나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뒤 바로 그 <어린이 차지>에 내가 지은 동요가 실려 나온 것이다.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6학년 3반 최인호라고 내 이름이 분명히 명기된 동요가 신문에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활자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썼으며 제법 유명한 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 단편소설 하나씩 썼을 정도이다. 그때 선생님은 멋쟁이들이어서 영어 시험에 유행가 가사만 써도 60점을 주곤 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희들이 지금은 내가 가끔 빵을 얻어 먹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이담에 너희들은 내가 네 옆자리에 앉았었다는 것만을 두고두고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나는 정신병적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였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에 <벽구멍으로>란 단편소설이 입선되었을 때도 나를 작가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심사위원은 황순원 선생님과 안수길 선생님이었는데 막상 시상식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하는 표정이었다.
상금은 당선작이 1만원이었고 가작은 3천3백원이었다. 그때 한국일보 문화부엔 손기상 씨가 문화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한심해서 담배만 푹푹 피워대셨다.
한국일보는 창피했던지 이 작품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았다.
내용은 어린 소년의 도벽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말, 나는 눈썹을 밀고 공부에 매어달렸다. 담임 선생임이 내게 어느 대학을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서울대학교 영문과 하고 대답하자, 니가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악담을 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학 미학과(당시만 해도 미학과는 인기가 없었다)가 아니면 고고인류학과에 가겠습니다 라고 주장했더니 선생님은 대뜸 내게 D대학 국문학과에 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난 그렇다면 연세대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합격시켜 준다고 해도(누가 날 공짜로 합격이라도 시켜 준다고 했던가) 난 안 가겠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교 때엔 가장 이상주의자, 졸업 후엔 가장 머리가 좋은 적응주의자 아니면 불평주의자들의 집단입니다라고도 했다.
서울대를 나온 담임 선생님은 대로해서 나를 미친 놈 취급을 했었는데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공연히 흥분할 필요 없다. 다만 내겐 머리 좋은 형이 있었고 그는 내게 언제나 모범을 보이는 맏아들적 기풍이 충만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울대 학생이었으므로 나는 되지 못하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영문과에 입학했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글쟁이를 지망하는 놈들이면 으레 국문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꼬와서 그런 것이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낙제를 했기 때문에 1학년을 두 번이나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기보다는 언제나 시네마코리아 극장에서 동시상영 영화나 보았으며 미친 듯이 글만 쓰고 있었다.
결국, 1965년도에는 <뭘 잃으신 것이 없습니까?>란 단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응모하고는 나는 틀림없이 당선하리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친구들을 불러다 미리 자축파티를 열기도 했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일보에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던 신홍범 씨를 그분의 사촌인 내 친구녀석과 함께 찾아가 내 소설이 틀림없이 우편으로 응모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결과는 보기좋게 낙선이었다.
울화통이 된 나는 1966년 한 해 동안을 신춘문예 당선의 해로 정하고 수십 편의 단편을 썼었다. <순례자> <술꾼> <모범동화> <견습환자> <전쟁우화> <예행연습> <전람회의 그림> <처세술의 개론> 등 수많은 단편을 썼으며, 나는 그 모든 단편들을 전 신문사에 투고하라고 내 동생 영호에게 명령을 내려놓고는 그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버렸었다. 나는 최소한 서너 군데의 신문사에서 한꺼번에 당선 통지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너 개의 당선소감까지 미리 써두고 입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선된 작품은 오직 한편, 조선일보의 <견습환자>뿐이었다.
12월 24일 밤.
우리는 눈이 내린 연병장에서 벌거벗고 기합을 받고 있었다. 알철모를 쓰고 기합을 받고 있었는데 싸락눈이 내 등에 송곳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밤 열차가 역마처럼 울며 달리고 있었다.
돌연 구대장이 연단에 서더니
"오늘의 기합은 이만 중지! 그 이유는 훈련병 중에 한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라는 해괴망측한 해석을 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채 구대장에게 이끌려 디젤 기름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교 숙소에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당선 축하. 조선일보.'
나는 이것 한 장뿐이냐고 물었다. 구대장은 나를 언짢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전보가 어째서 한 장뿐이야고 물었다.
"이 친구 전보를 무슨 주택복권으로 아네."
그들은 웃었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기합을 덜 받은 동료들은 내게 몰래 빵도 주고 사탕도 주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의 머리가 다들 돌대가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땅히 내 것을 모두들 당선시켰어야 했다고 나는 차디찬 담요 속으로 기어들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나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무슨 슬픈 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흔들어서 깨고 보니 옆자리에 누웠던 같은 훈련병이었다.
"꿈을 꾼 게로군."
무슨 대학원에 다니다 입대한 얼빠진 녀석이었다. 그는 구보도 못하고 우향 우 좌향 좌도 제대로 못하는, 이른바 고문관 녀석이었다. 녀석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단체 기합을 받곤 했었다. 녀석은 언제나 미원을 한봉지 가지고 다니며 콩나물국 속에 넣어 먹곤 했지만 주위 동료들에게는 조금도 나눠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바늘에 실 하나 꿰지 못하는 주제에 밤마다 몸을 위한다고 종합 비타민만 먹으며 갓 결혼한 신부가 보고 싶어 질질 짜던 녀석이었다,
나는 가끔 그의 사물함을 정돈해 주었으며 그가 우리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녀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갖고 있어서 구보 같을 때엔 대신 총도 메어 주곤 했는데, 녀석은 그래도 미원 한줌 선심 쓰는 일이 없던 녀석이었다.
"니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
내 눈엔 눈물이 홍건히 괴어 있었다.
"네 당선을 축하한다. 넌 이제 작가가 되었구나. 작가, 얼마나 좋겠니. 담배 하나 줄까."
나는 녀석이 주는 담배 한 가치를 받아들고 밤의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은 눈의 꽃밭이었다. 발자국도 없어서 순백의 처녀림이었다. 그것은 내가 써야 할 원고지의 무수한 공백들처럼 보였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눈을 부릅뜨고 눈부신 백야의 연병장을 노려보았다.
나는 쓸 것이다. 저 눈 쌓인 마당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내 이름을 쓰고, 내가 보고 듣고 그리고 앞으로 닥쳐야 할 미래의 이야기들을. 그러나 잊지 마라. 네가 쓸 글이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기를 원해서는 안 돼. 네가 쓴 기록을 보라, 또다시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눈발에 의해서 비워지고 묻혀지나니. 덧없는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 나뭇가지에 묻어 있는 아주 작은 잔설 하나를 흔즐어 뼈에 붙어 있는 살 한 점 뜯어 내듯, 네가 선 자리에 덧없이 떨어져 네 죽은 뒤에 이루는 비문처럼 인장을 새기나니, 아아 통곡할지어다. 밤을 새우며 통곡할지어다.
천지신명은 돌아눕고 너는 이제 말의 걸인이 되어 저문 저자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며, 행여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 주는 말을 동냥해서 이 더럽고 저속한 시대, 남루한 식탁 위에 필요한 양식으로 내놓으리니. 아흐, 굽어 살피소서 굽어 살피소서. 나날의 성찬에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비럭질할 수 있도록 정승대감은 굽어 살피소서.
얼씨구 얼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절씨구 들어간다. 붐빠 붐빠 들어간다. 붐빠붐빠 들어간다. 얼씨구 씨구 씨구 씨구 들어간다.
5
이로써 나는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제대하는 1970년도까지 나는 단 한 장의 원고청탁서도 받은 적이 없었다. 내 딴에는 주옥(?)같은 단편이 십여 편 비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청탁서가 오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군대에 있는 3년 반 동안 나는 오직 <사행>이라는 단편소설 하나만을 섰을 뿐이였다.
1970년 2월, 제대하자마자 나는 초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제대하고 영문과에 다시 복학을 하였지만 그 무렵 아내 황정숙과 심각한 연애를 걸고 있었으며 곧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작가는 원고를 써서 먹고 살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색이 작가인데, 그래도 <현대문학> 같은 데서 나오는 작가의 주소록에는 내 이름이 꼬박꼬박 기재되어 있는데 어째서 그 누구에게서도 원고청탁을 받지 못할까 하고 나는 조바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 3월인가 4월, 나는 대낮에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물어 물어서 당시 효제동에 있던 <현대문학사>를 찾아 갔었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이 소설가 김국태 씨였다. 내가 술 취한 뻘건 얼굴로 찾아가 불쑥 원고를 내어밀자 그는 내게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소설 원고 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그러자 나는 신병처럼 큰 소리로 고함질렀다.
"나는 작가요. 나는 소설가요. 내 이름은 최인호입니다."
"놓고 가시오."
그 당시만 해도 <현대문학>에 원고가 실리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기였다. 다달이 원고가 밀려서 서너 달 뒤에 나와도 그 사람은 그만큼 행운아였던 것이다. 원고를 주고 와서도 나는 기대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님이 내가 제발로 찾아가 <현대문학사>에서 해프닝을 벌였다는 소문을 그분의 막내아들인 황진규 군(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생이며 내 절친한 친구였다)을 통해서 들으셨는지 선생임이 뭐라고 한마디 해주셔서 두 달만에 <술꾼>이라는 단편이 드디어 <현대문학>에 실리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 <술꾼>이 실린 <현대문학>을 신촌의 한 서점에서 확인하면서 홀로 눈물을 흘렸었다. 나는 <술꾼>이라는 작품이 곧바로 문단의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당시의 문단으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독특한 작품이라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음호의 <현대문학>에 김교선이란 평론가가 매우 호의적인 평을 월평란에 써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도 않게 엉뚱하게 주목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김승옥 씨였다. 그는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보는 사람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선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점 나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숭옥 형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호철 씨도 뒤에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인정을 하였으면서도 이 작가가 다음에 쓰는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야만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일단 유보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술꾼>이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삼사 개월 후의 일이었다. 당시 김병익, 김치수, 김현, 김주연 소위 4K로 불리는 네 젊은 평론가가 <문학과 지성>이란 계간지를 창간하기 앞서 창간호에 <술꾼>을 재수록한 것이었다. 소설가 김승옥 씨가 서울대학 문리대 동문이면서도 고향 친구였던 김치수 씨에게 귀띔을 해서 <술꾼>이 재수록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문학과 지성>에서는 문단에서 호평을 받는 문제작들을 재수록 하는 독특한 편집 형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론가 김치수 씨가 만나자는 연락을 하였다. 청진동 어느 골목 다방에서 만났더니 '당신의 작품이 좋으니 재수록 하겠다. 물론 재수록 원고료는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면지의 문단인들을 차례차례 알게 되고, 그들과 간첩처럼 접선하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놀라운 행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문단 진입은 시작되었다. 당시 <현대문학>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월간문학>을 찾아가 이문구씨를 알게 되었으며 그 잡지에 <모범동화>를 싣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써둔 작품이 십여 편 있었으니 그 어디서든 원고청탁이 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무렵 김현 씨와 김치수 씨가 나를 찾아와 최 형이 써둔 원고량이 많이 있다는데 내일 아침 작품을 줄 수 있겠냐고 묻길래 나느 선뜻 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내게는 <미개인>이란 중편이 있었지만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었으므로 잘하면 하룻밤 사이에 그 작품을 완성해서 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읽어 보니 완성시키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는 수 없이 신작을 쓰기로 하고 밤새워 쓴 작품이 <타인의 방>이었다. 당시 나는 아내와 신혼으로 북아현동 한성고등학교 앞에 있는 복수목욕탕 이층집에서 방 하나를 전세 들여서 살고 있었는데, 고이 잠든 아내 옆에서 꼬박 새우며 원고를 다 쓰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때의 생활을 제법 유머러스하게 적은 꽁트가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그와 그의 아내가 결혼하고 나서 제일 먼저 얻은 방은 십오만 원짜리 전셋방이었다.
그가 그의 집 식구들에게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하고 선언하였을 때 그의 집에서는 놀라고 펄쩍 뛰었다. 이 녀석아, 글세 결혼이라는 게 불알 두 쪽 가지고 되는 것인 줄 아느냐, 사는 게 그리 쉬운 것인 줄 아느냐 하고 공갈 협박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꼭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집에서 미친 척하고 이십만 원만 꾸어 주쇼. 나중에 갚아 드리겠쉬다 하고 아랫방에 전세 들여 이십만 원을 갈취하였다.
이리하여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군대 제대하고 복교한 소설가 지망생인 그와 나이는 동갑내기로 이미 몸도 마음도 그 알량한 소설가 지망생에게 불법침입 당해 이제 아무리 생처녀 행세를 한다 해도 팔릴 것 같지 않는 노처녀인 야인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제일 싸구려 청첩장을 돌리고 싸구려 돗대기 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애인은 그래도 신랑에게 선물이라고 제일모직 신사복 한 벌을 해주었고 신랑은 아내에게 싸구려 루비 반지 하나 해주었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을 안 갈 수 없어서 워커힐인가 스카치힐인가 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잤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호텔 안에서 피가 나도록 뽀뽀만 하고, 뽀뽀만 했다.
그래도 친구랍시고 백 원, 오백 원 코묻은 돈 가져다 준 부조금을 합쳐 보니 식장비와 신혼여행비 정도 되고도 한 이만 원 남아 우선 한달은 먹고 살수 있겠다고 환호자약하였다. 그리고 입주한 곳이 바로 그 문제의 방인데, 이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사의 방이 아니라 도깨비 방이라는 말씀이다.
남의 집 전세로 드나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빨래 하나 하려 해도 눈치 봐야 하고, 변소에서 소변 보려 해도 눈총 받는 판이어서 명색이 대학 출신 부부는 문화인답게 십오만 원 정도로 남의 눈치 안 보고 배짱 편하게 살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구한 것이 바로 그 방이었다. 이 방은 남의 집 문간방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파트와 같다. 십오만 원짜리 아파트라 하면 놀라 자빠지시겠지만 무언가 하면 여관 이층방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 여자 좋아하고 오입깨나 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소위 독탕이라는 곳인데, 들어가면 공중전화통 같은 목욕탕이 있고 목욕탕 앞에 침대가 놓여 있는 5평짜리 방이라는 말이다.
맨 아래층은 대중탕이어서 남탕 여탕이 분리되어 있고, 이층 삼층은 오입장이들이 드나들고 창부 서넛 대기시켰다가 그 방에 들여보내는 말하자면 일종의 창녀집인데 목하 성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날조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은 그 목욕탕 부근에 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들이 교육의 전당 부근에 창녀집이 웬말이냐 비분강개해서 진정한 것이 주효해서, 배부른 목욕탕 주인이 궁여지책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전세 아파트(?)인 것이다.
그는 그 아파트 이층에서 생활하였다. 그래도 문화인답게 스팀이 들어오고 더운 물 찬 물 틀면 나와서 그는 목욕 따위는 배포 유하게 하루에도 서너 번 해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다.
그러나 말이 방이지 급조한 방이다. 옆집의 숨소리까지 다 들려 오고 밑바닥은 콘크리트라 별 수 없이 서대문 로타리에서 유도 도장에나 쓰는 싸구려 밀짚을 사다가 밑에 깔고 그야말로 초가삼간 외양간 같은 기분을 내고, 눈만 뜨면 그 방에서 이젠 결혼도 했으니 안심하고 합법적인 뽀뽀만 하였다.
그 부부가 사는 방은 여탕 이층이라 물 끼얹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왜 여탕에선 애 우는 소리가 그리 극성스러운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 더운 물 더 주세요 어쩌구 하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 와서, 이를테면 그는 희멀겋게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의 엉덩이 밑에 깔고 사는 주지 욕정의 의자왕쯤 되는 기분이어서, 에라 콘크리트 벽을 뚫어 심심풀이 여체 감상이나 할까 어쩔까 궁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 아침 저녁 여관, 목욕탕이라고 푯말 붙은 그 아파트를 자주 오가게 되자 하루는 여관 앞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소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여보 젊은이, 나도 여자 좋아하지만 젊은 몸 생각하셔야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 목욕탕 드나드는 모양인데 몸 생각해야지. 힛히히....."
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서 그냥 있었지만 내심 이 무지몽매한 자식아, 오입이라면 니놈이나 할 것이지 왜 애꿎은 나를 들먹이냐 하고 투덜대었다.
그 이후부터는 집 앞을 드나들 땐 주위를 휘둘러 보고, 아내가 시장 갈 때는 그 망할 놈의 이발관 주인이 아내를 마치 목욕탕에 전속된, 새로 온 제법 예쁜 색골 창녀쯤으로 볼 것이 아닌가 우려되어 꽁꽁 앓았던 것이다.
이 목욕탕 이층집에서 나는 70년 1월부터 7년 봄까지 살았다. 아마 그때가 1971년 봄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무렵 한꺼번에 <현대문학>과 <월간문학>, 그리고 <문학과 지성>에 내 작품이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문단에서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신예작가가 한 명 탄생했다고 야단들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계간지 <창작과 비평사>과의 관계에 대하여 밝혀야 할 사연이 있다. 당시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문학과 지성>의 창간도 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다. <창작과 비평>은 방영웅 씨의 <분례기>가 연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 역시 <창작과 비평>에도 내 소설을 싣고 싶었으나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자였던 염무웅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었다.
수송동 어느 일층 다방에서 만났느데 그는 내게 작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중편이 하나 있다고 대답한 후 곧 <미개인>을 완성해서 며칠 후 그를 다시 만나 작품을 주었는데 다음호에도 또 다음호에도 내 작품은 실리지 않았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내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연락을 한 후 물었더니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작품의 주제가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저항의식이 없으니 뒷부분을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두들겨 맞고 끝나는 것은 지나친 패배의식이니 이를 좀더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염무웅 씨의 그런 주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창작과 비평>은 소위 참여문학을 주장하고 있었고, <문학과 지성>은 순수문학을 주장하고 있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을 평론가가 감히 이리 고쳐라 저리 고쳐라 하고 주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입으로 말해버렸다. 젊은 작가가 그런 말을 하는데 그로서는 놀라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당장 그 작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두말없이 <창작과 비평>의 편집실로 돌아가 원고를 가져와서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때 염무용 씨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은 <미개인>이란 작품의 주제가 약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문학과 지성>을 통해서 신예작가로 각광받고 있는 실황에서 새삼스럽게 내 작품을 다시 <창작과 비평>에 실음으로써 한 신인작가에게 양대 문학 계간지가 모두 문을 개방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문학 정신들이 약화되었는지 오히려 그 당시의 치열했던 문단의 상황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나는 그 원고를 주머니에 찌르고 수송동 골목을 걸어나오며 절대로 절대로 <창작과 비평>에는 앞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창작과 비평>에서는 작가 황석영을, <문학과 지성>에서는 나를 마치 차세대의 선두주자인 것처럼 밀고 후원하는 보이지 않는 문단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72년 봄. 나는 눈부신 1971년의 활력으로 <현대문학>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작가가 문학상을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금이 이십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것과 전세금 십오만 원을 합쳐서 나는 연희동에 있는 새마을 아파트 3동 404호, 방 두 칸의 열세 평 아파트를 '삼십오만 원'에 전세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는 한때 내 소개로 시인 고은 씨도 한 일 년 간 살다 갔고 소설가 최인훈 씨도 한 육 개월 살다가 떠났던 유서 깊은 아파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아파트를 잊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별들의 고향>의 작품 무대가 바로 이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6
1971년의 한여름 나는 그때 빌빌 놀고 있던 영화감독 이장호 군과 청주에 있는 조그마한 여승 절인 화장사란 곳에서 한여름을 머무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장호 군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 것 같다. 만약 신문 연재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겠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설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이장호 군은 조감독으로 백수건달이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당장에 눈빛을 밝히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 소설은 내가 영화화하자. 약속해 임마. 그 소설은 내 거야."
2년 뒤에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장호 군은 자기를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혈서를 쓰는 공갈협박 끝에 내게서 소설을 공짜로 빼앗아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관객 50만명을 동원하는 신기록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만 해도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의 바람이었을 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리 만무한 황당무계한 소망이었다.
당시 신문소설은 50년대 작가들의 독무대였다. 역사소설은 으레 박종화, 유주현 씨의 차지였으며 현대소설은 40대 이상인 50년대 작가들이 대부분 쓰고 있었다. 손창섭 씨의 <부부>, 이호철 씨의 <서울은 만원이다>가 인기를 끌었으며 60년대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청준 씨가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다가 도중 하차한 뒤로는 젊은 작가들에게 신문 연재를 맡기는 것을 위험한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신문사의 편집진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가까운 시일 안에 연재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이 막연한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1972년도 조선일보에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던 황순원, 박영준 두 선생님에 의해서였다.
두 선생님에게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유경환 씨가 신문소설에 새 바람을 넣고 싶은데 추천할만한 젊은 작가가 있느냐고 묻자 두 분이 한결같이 내 이름을 거론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유경환 씨는 나를 불렀다. 그때가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손장순 씨가 쓰는 <세화의 선>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경환 씨는 내게 신문의 연재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었다.
1년 전부터 느끼던 왠지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드디어 신 내린 무당의 쪽집게 점괘처럼 들어맞게 되었으니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자 유경환씨는 내게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했었다.
그날 그때부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버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신문 연재를 하게 됐다. 신문연재야말로 작가가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작가들은 이 귀중한 지면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어째서 독자가 없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 독자가 없다니. 신문을 보는 사람이면 모두가 독자이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장이 새로워야한다. 문장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하고 싶다.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기억되는 문학 작품이 없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나오고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카츄샤가 나온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에서는 올렌까가 나오며 토마스 하디의 소설에는 테스가 있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오랜 동안 기억하도록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한 번쯤 깃들었다 스러지는, 누구나의 호주머니에 한 번쯤은 소유했다 버려지는 그런 여인, 특별한 지식과 특별한 재능을 지닌 여인이 아니라 마치 체호프의 소설에 나오는 올렌까처럼 보통 여인,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두 개의 원칙. 하나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하루하루의 신문을 통해서 철저히 느끼도록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이 새롭고 독특해야 할 것이며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서 연재소설의 호흡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명력에 의해서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되어 마치 자신의 첫사랑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기억되어질 것을 염두에 둘 것.
이 두 개의 원칙이 <별들의 고향>을 쓰는 내 작품 의도였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현대 시인들의 시를 삽입해 보자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도였다. 당시 소설은 물론이고 '시'는 아예 읽히지도 않는 문학의 장르였다.
소설의 중간에 그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시를 삽입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시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는데 후일담이지만 이 계획은 독자들에게 의해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강은교, 박성룡, 마종기, 유경환 등 수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소설의 중요한 장면에 접목되었는데 독자들은 이런 처음보는 형식을 반겨하였으며 신문소설을 통해서 현대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호응을 해왔던 것이었다. 특히 강은교 씨의 시는 그 당시 하나의 유행이 될 정도로 독자들의 입에 즐겨 희자되곤 하였었다.
연재한 지 며칠 뒤 유경환 씨가 나를 다시 불렀다. 긴장해서 달려갔는데 유경환 씨는 나를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동호 씨에게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신동호씨는 내 고등학교 까마득한 선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사실을 미리 밝혀 나를 잘 봐달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신동호 씨는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도서실의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유경환 씨와 찾아간 나를 보더니 대뜸 소리쳐 말하였다.
"뭐야, 당신이 작가야. 우하핫, 당신이 신문소설을 쓸 수 있다구."
하고 대뜸 웃기부터 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최씨에 옥니에 곱슬머리입니다. 뒷날 저에게 그런 말 하신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고 더구나 동안이었으므로 아마도 그 분의 눈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비쳐 보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믿을 수 없었는지 신동호 씨는 일주일 안으로 앞으로 쓸 연재소설을 대충 줄거리를 써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작가로서는 차마 참을 수 없는 수모였지만 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하며 연재소설의 줄거리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줄거리를 미리 쓰라는 요구는 작가인 나에게는 부당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줄거리를 미리 쓰는 작업을 통해 보다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해졌으며 소설의 맥도 확실해졌으며 소설의 골격이 짜여질 수 있었던 장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줄거리의 내용대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면 이 소설은 에밀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의 유형의 자연주의적 작품의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성과를 얻는 대신 그만큼 재미는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흥미있는 것은 미리 쓴 줄거리에는 주인공의 이름 '경아'가 '조승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조승혜에서 경아로 바뀌어진 것은 연재가 시작할 무렵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가수 이장희 군에게 써주었던 토크 송의 가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등학교 후배인 이장희 군은 당시 히트곡이 없던 무명 가수였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노래 가삿말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때 나는 오래 전 내가 습작으로 썼었던 소설의 한 부분을 써주었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 나는 경아가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경아를 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뒷날 이장희 군에게 심심풀이로 <그건 너> <한잔의 추억>과 같은 노래의 가삿말을 써주었던 나는 내가 써준 이 낙서와 같은 가삿말이 이장희 군에 의해서 낭독되어 소위 토크 송이라는 형식을 출반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었다.
그 당시에 짐 리브스라는 저음의 외국 가수가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를 낭송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힌트를 얻은 이장희 군이 이른바 토크 송의 형식으로 내가 써준 가삿말을 낭송하였던 모양이었다. 이장희 군은 이것을 <겨울 이야기>라는 제목의 레코드로 출반하였으며 이것이 의외로 큰 히트를 했었다.
노승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아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히트된 토크 송에서 그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사실 노승혜라는 이름보다는 경아라는 이름이 더욱 귀엽고 평범하며 보편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제목도 고쳐졌다. 내가 현재 대우자동차 판매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형님 최정호 사장과 고심 끝에 작명한 원래 이름은 <별들의 무덤>이었다. 이 제목을 신문사에 가지고 갔더니 신동호 편집국장이 말하였다.
"조간신문에 무덤이라니 재수 없게, 다른 이름으로 고쳐 봅시다."
신동호 편집국장과 당시 편집국의 간부진이었던 이종식씨, 조영서 씨와 나 네 명이서 즉석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그 회의에서 결정된 제목이 <별들의 고향>이었다. 연재의 삽화는 김영덕 씨가 맡았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가의 말을 사고에 썼었다.
'큰 욕심은 부려 보지 않겠다. 나이가 젊다고 객기를 부려보지도 않겠다. 신문소설이 작가에게 주는 영향은 대부분 마이너스라는 소리도 수십 번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겁이 난다. 그러나 최소한도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사건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써보겠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설 속에 흔히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 우연적인 사건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연적 사건은 될 수 있는 한 피해 볼 작정이다. 예쁘고 착한 여자를 그려볼 작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남자상들은 대부분 비열하고 잔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들이다.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악인을 그려내 보일 재주가 없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인의 얘기가 독자들의 구미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약간은 환상적인 여자의 얘기가 어떤 반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보이겠다. 매일 아침 신문에서 만나볼 독자 여러분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린다.'
김영덕 씨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화자인 나를 그릴 때 그 남자의 얼굴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자 고심 끝에 내 실제 모습을 모델로 해서 삽화를 그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신문 연재 동안에 김영덕 씨가 그렸던 남자 주인공인 '나'의 모습은 얼굴이 길고 마른 당시의 내 모습과 쌍둥이 처럼 닮아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 보면 경아의 모습을 나는 키가 155cm 가슴둘레는 78cm 몸무게는 44Kg 가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으며 남보다 작은 키를 감추려고 삼승용 하이힐을 신고 다니고, 짝짝이 눈꺼풀을 갖고 있으며, 알 벤 게처럼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연재 도중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실제로 경아와 같은 여인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었는데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지만 경아의 모습은 당시 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아의 키는 아내의 키였으며 경아의 몸무게는 아내의 몸무게였다.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다는 경아의 신체적 묘사도 실제로 아내를 묘사한 것이었다. 경아가 첫 번째 남자인 영석이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데 그중의 많은 묘사는 실지로 아내와 내가 연애시절에 겪었던 경험을 소설로 옮겨 놓은 것이다.
소설이 연재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반응이 일기 사작하였다. 경아가 첫사랑에게 배신 당하고 아이를 지우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마도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는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인 듯 싶은데 이때부터 소설과 국산영화에 걸핏하면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여자 심리를 잘 안다고 해서 작가 최인호가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져 들려오고 도대체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몇 살이냐, 산전수전 다 겪은 쉰 살이냐, 뭐라구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라구? 아니 그렇게 젊은 청년이 어떻게 여성의 심리를 그처럼 잘 알아? 그러더니 갑자기 전국의 술집 여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경아로 바꾸는 유행이 일기 시작하였다. 남자들은 경아가 불쌍하다고 해서 저녁마다 술을 마셨으며, 어느 날 연극 연출가 허규 씨를 만났더니 경아가 너무 불쌍해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셨는데 경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행복한 시나리오를 만드시오 하고 내게 협박을 할 정도였다.
나는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줄곧 공책에 한 번 쓴 다음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정서를 하는 이중 작업을 했었다.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작가생활을 하면서 두 번 이상 정서하는 중복작업을 했던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에도 소설을 출판하자는 출판사는 없었다. 그 당시 신문의 연재소설은 출판되어도 잘 팔리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하루는 뚱뚱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별들의 고향>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예문관이라는 출판사의 최해운 사장이었으며 그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일 아침 이 소설을 읽었다면서 자기가 이 소설을 출판하고 싶은데 내 의견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내가 좋다고 했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오만 원의 계약금을 꺼냈다. 그리고 계약조건을 말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즉 앞으로 7년 동안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절대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출간될 수 없으며 오직 예문관에서만 낼 수 있다는 독점 계약의 조건이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삼류무협소설에서 본 구절을 기억해낸 나는 그에게 몸을 기탁하기로 하였다. 그와 맺은 7년 간의 독점계약에다가 3년을 더 보태어 정확히 10년 간 나는 예문관 한곳에서만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었다. 정확히 10년을 채우고 나는 예문관을 떠났다.
최해운 씨는 단행본으로 신문에 전 5단 광고를 한 첫출판인이었으며 그는 당시에는 금기시되어 있던 작가의 얼굴을 책표지에 내보인 최초의 출판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진작가를 불러다가 나를 길거리에 세우더니 정신없이 표지사진을 찍었다.
웃으세요, 웃으세요, 하는 사진 작가의 명령에 따라 평생 처음 나는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찍은 최초의 웃음 띤 사진인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후부터 책에 실리는 사진이건 신문광고에 나오는 사진이건 내 얼굴은 치약 거품을 물고 있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1년 후 314회로 연재가 끝나자 반응은 대단하였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별들의 고향>을 다루고 있었다.
'<별들의 고향>의 작가 자신은 이 소설을 성인 동화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지만 <별들의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다루면서, 그것을 마치 환상을 다루는 것처럼 처리한데서 독자들을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장점이 있다.
김주연 씨 등 문학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어떤 유형의 인간들에게 대입시켜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서 다른 작품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포용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별들의 고향>에 갈채를 보내는 오늘의 젊은 세대는 전투적인 참여파나 퇴폐적인 반문화의 신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소시민적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별들의 고향> 연재가 끝나자 신 편집국장도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미안하네."
그때가 70년대. 웃지 않는 독재자 박정희 씨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 나는 대통령 다음으로 신문에 사진이 많이 실리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곧 내가 우려하였던 대로 <별들의 고향>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당시의 유신 상황으로 보았을 때 문학은 마땅히 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사명감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여 문학인들과 대학생들은 <별들의 고향>의 출판적 성공과 영화의 놀라운 성공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별들의 고향>의 신드롬 현상은 사회의 비판의식을 갉아먹는 무서운 독소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별들의 고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지식인들은 <별들의 고향>을 호스티스 문학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경아의 직업이 한때 호스티스였을 뿐 소설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호스티스 문학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멋지게 붙여진 용어로 융단 폭격하기 알맞은 목표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업주의 소설이라는 신용어도 등장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조해일, 조선작, 김주영, 송영, 뒤늦게 나온 한수산, 박범신까지 70년대 작가들을 총 싸잡아서 이들의 작품은 대중소설이며 더럽고 야비한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지탄받기 이른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약간의 신경쇠약 증상까지도 느낄 만큼 황송하게도 70년대의 대표 작가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이라 예견되었던 상황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상, 하권 합쳐서 100만 권 가량 팔린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이 책의 인세로 당시 황무지였던 강남 신사동의 땅을 사서 빨간 지붕의 양옥집을 짓자 '최인호 강남에 호화주택을 짓다'하고 서울신문에서는 사회면에 대서특필하기도 했었다. 그 무렵 평론가 김현씨가 나를 불러 어느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
"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 한다. 당신은 우리가 웅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우리의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하여 달라"
나는 그때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게 신경쓰지 마시우 형님.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 내 이름이 부담스러우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제외시키시오."
지금의 얘기지만 그때의 그런 판단이 내게는 참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문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화가는 화단을 떠나야 하고 하다못해 중도 종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곳이든, 예술가든 작가든 구도자든 그들이 속해 있는 필드 즉 단은 그들의 정신을 갉아 먹는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혼자여야 하고 문단을 의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단이란 생리적으로 하나의 먹이사슬 형태를 갖고 있기 마련으로 이념과 지방색과 학연과 인연으로 뭉쳐진 하나의 집단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복잡하게 신문과 잡지의 담당 기자들까지 합세하여 마치 조직깡패와도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의 조직원을 키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문학상을 나눠 먹는 식의 야합은 결국은 작가의 정신을 죽여버린다. 소위 교묘하게 만들어지는 문제작품은 결국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지는 글일 수밖에 없으며 작가의 안목을 눈치와 허위의 함정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문단으로부터 발을 끊어버린 나는 스스로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줄이 끊겨버린 연처럼 나는 바람 부는 대로 떠다녔다. 이십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참여해 본 것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경험이다. 이장호 감독과 함께 <별들의 고향>을 만든 이후 <어제 내린 비>를 만들었으며, 돌아가신 하길종 감독과는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2> <병태와 영자> 등을 만들었다. 이경태 감독과는 <도시의 사냥군> <불새>를 만들었으며, 배창호감독과는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곽지균 감독과는 <겨울 나그네>를 만들어 보았다.
만약 내가 김현 형님으로부터 그러한 제의를 받았을 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물론 문단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도 대학생들에 의해서 존경받는 작가의 1,2위를 다투는 모범생 작가가 되어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위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내린 선택이야말로 최선이었다고 판단한다.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본 내 지난 과거의 발자취가 이제 나를 산으로 이끌고 있다. '깊게 가려면 바다 밑으로 가고 높게 가려면 산 꼭대기에 가라'라는 선가의 말처럼 나는 이제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다.
어쨌든 스스로 문단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그날 이후부터 평론가의 글에서 내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얼마 후 문단에서는 곧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윤홍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쉰 살이 넘은 이제야 비로소 나는 젊은 시절에 내가 찾아냈던 여인 경아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죽은 경아. 죽어서 자신의 소원대로 청산 가는 나비가 되어 훨훨훨 나래를 치면서 날아가버린 경아. 경아야말로 지금은 흘러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 내 청춘의 젊은 초상인 것이다.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먼 강가의 강물처럼. 구멍을 통해 흘러 내려와 오 분이면 정확히 텅 비어버리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흔적없이 새어버린, 그러나 한때는 분명히 존재하였던 젊은날의 내 모습 그대로였던 경아를 이제야 다시 마주보게 된 것이다.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졸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를 두고 노래한 서정주의 절창처럼, 경아야말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내 젊은 날의 머나먼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내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분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 한 때는 내 딸처럼 느껴졌었지만 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경아 그대에게 바치는 내 뒤늦은 축문이오니, 경아여 이제야말로 헤어질 때가 가까어 왔으니, 잘 가시오 경아. 그리고 안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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