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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지상의 방 한 칸 / 김애자

by 안규수 2016. 6. 3.

 

  해마다 입춘날이면 사찰에선 삼재풀이 행사로 법석거린다. 신도들이 액막이로 삼재가 든 가족의 속옷이나 양말 따위를 싸들고 와, 감강경이 인쇄된 봉투를 받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기 때문이다.

  경은사는 집에서 30분 정도면 올 수 있는 거리여서 나는 몇 해째, 눈 어둡고 글 모르는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삼재가 든 자손들의 생년과 이름을 적어 봉투에 넣어주는 일을 맡고 있다. 내 살붙이들을 재난으로부터 지키려는 정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결코 이런 행위를 지식의 잣대로 기복종교라거나, 샤머니즘의 한 풍속이라고 몰밀어 비난해선 안 될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순수이성비판』을 쓴 임마누엘 칸트도 "신은 없지만, 그러나 신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절대의 믿음으로 인간의 삶이 보다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신도들이 거반 흩어지고 나면, 나는 절 마당 한 귀퉁이에 마련된 소각장으로 나간다. 액막이로 사용했던 물건들을 태우는 불꽃을 향해 합장을 한다. 크게는 나라의 안위를 빌고, 작게는 삼재가 든 이들과, 나와 인연 맺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원이 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른다. 매번 가슴이 울먹해서 수 없이 반 배를 올린다.

  불꽃이 어느 정도 사그러들면 건너편 고갯마루로 시선을 돌린다. 금봉낭자가 박달도령에게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넣어주던 '천등산 박달재'에는 아직도 겨울이 깊다. 눈 덮인 고갯마루를 보고 섰으면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 필경 그 여인은 올 입춘에도 어느 산사에선가 발원發願의 촛불을 밝혔을 것이다.

  여인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다. 입춘 전날에, 그 산사의 약사여래 불상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때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통에 미처 녹지 않은 눈과 빗물이 범벅이 되어 길은 빙판이었다. 더구나 멍든 자국처럼 퍼렇게 더께가 진 얼음 위로 낙엽의 잔해들이 얼어붙어 자칫 발을 잘못 떼어놓았다가는 어디로 나뒹굴어질지 모를 판국이었다. 차를 관리소 주차장에 세워두고 나섰지만, 오금이 저려 기어가다시피 절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고 저녁공양도 끝난 뒤였다.

  주지스님을 믿고 간 터였지만, 공양주에게 따로 저녁상을 받기란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한 끼 굶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하겠는데 주지스님은 한사코 상을 차리게 했다. 다행히 공양상을 들고 온 분은 노보살이 아닌 40대 후반쯤 되었을 낯선 여인이었다. 설거지를 끝낸 뒤라 차려온 상 앞에서 안절부절인 내게 그는 컵에 물까지 따라 주며 살갑게 대해주었다.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객실로 들었다. 산사의 구들방은 언제나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향집 안방처럼 아늑했다. 지창 밖에서 기왓골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도 좋았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밤이었는데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저녁상을 차려주었던 여인이 쟁반에 과일을 담아들고 와 서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그녀는 칼로 사과를 돌려 깎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주지 스님이 주신 『달의 서곡序曲』을 읽어봤습니다."

   "잡문에 불과한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왔는데…"

  사과를 깎아 4등분으로 쪼개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반백 년 가까이 살아왔을 연륜에 비해 자태가 단정했고, 목선이 가늘어 몸피가 수척해 보였다. 사과 접시를 앞으로 내미는 여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참 맑았다. 저런 눈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았을까 싶었다.

  부탁이 있다던 그녀는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을 밤비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쪽에서 먼저 말문을 터 주어야 될 것 같아 사과 한 쪽을 입에 넣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는 표시였다. 이내 마음이 통하였다. 말문이 열리면서 나직나직 들려주는 그녀의 과거 속으로 나는 홀린 듯 끌려가고 있었다.

  25년 전, 겨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태백선을 달리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설경에 감탄사를 폭죽처럼 터뜨리어도 시원찮을 것이나, 두 사람은 창문을 통해 조망하는 설경에 대해 입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친구가 일러준 산사를 찾아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기차는 검은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인 태백역을 지나고 나서도 또 몇 구비를 더 돈 후에야 작은 역사에 도착했다. 초행인 그들은 역무원에게 산사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적송이 빼곡하게 들어선 산길을 걸었다. 눈길을 걷는 동안만은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인 양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막간에 허락된 유희였다. 막간의 유희는 막간답게 반시간도 못되어 끝났다. 스님이 거처하시던 문설주에는 며칠 후에나 돌아올 것이란 글발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신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과 동시에 한기까지 밀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부처님께 두 무릎을 꿇고, 두 팔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법도를 몰라 명절날 세배 드리는 식으로 절을 올렸다.

 잠시 후 청년은 불단 아래에 놓인 주전자를 들고 나가 샘물을 가득 퍼 들어왔다. 다기에 물을 따라 놓고 우리끼리 예를 올리자고 했다. 실은, 주지스님을 모시고 혼례식을 갖추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그 절 주지는 친구의 삼촌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철천지원수지간이라도 되는 듯, 앙분을 품고 기어이 두 사람의 관계를 떼어놓겠다고 핏발을 세워서, 그런 방법이라도 써보자는 배짱으로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부재중이었고, 방문마저 굳게 걸려 있었으므로 속히 돌아서야만 막차를 탈 수 있었다. 결국 싸늘한 마룻바닥에서 정화수 한 그릇을 가운데 놓고, "내 알고 니 알고, 하늘과 땅만이 아는 예"를 올리고는 하산을 서둘렀다.

  그들은 도시로 돌아왔으나 사랑의 노둣돌(*말을 타고 내릴 발돋움으로 쓰기 위해 대문 놓은 ) 을 놓을 방이 없었다. 여자의 가방 속에는 여관에서 사흘 쯤 먹고 묵을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차마 내가 돈을 치를 것이니 여관으로 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리운 밤에, 둘은 잔치국수 대신 짜장면 한 그릇씩을 사 먹고는 각자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가도 청년은 이렇다 할 묘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죽이든 살리든 자기 집으로 끌고 들어가 주기를 바랐다. 청년은 입술이 검게 타도록 식음을 전폐하고 항거해 보았지만, 부모님은 너 같은 자식은 아예 족보에서조차 이름을 빼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매몰차게 대하는 거였다. 청년은 억하심정이 일어서였는지, 빙벽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어서였는지, 기다려 달라는 말도 한마디 남기지 않고 훌쩍 외국으로 떠나가 버렸다. 정부에서 한창 인력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던 때였다. 그렇게 떠나선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어디에선가 한국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입소문만 바람결처럼 떠돌았다.

  그 바람결은 믿기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던 바람결은 서서히 회오리로 변했다. 원망과 그리움과 아픔으로 뒤엉킨 회오리에 휘말려 그녀는 10년 동안을 실성한 듯 태백선 열차에 몸을 싣고 암자를 찾아다녔다. 혹여 그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다녀가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두 사람이 정화수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면서 만일 헤어지게 된다면, 섣달 그믐날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 약속이 뇌관이 깊이 꽂혀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지만, 청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가 한 서린 집념을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했을 땐 30대 중반이었다. 그 절의 스님이 삼남매가 딸린 홀아비에게 중매를 섰던 것이다. 폐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세 아이들은 모두 열 살 미만이었는데 그 중, 셋째 꼬마는 두 돌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아빠를 따라 영정 앞에 선 어린 것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떠안아야만 될 숙명이란 느낌이 들더라고 했다.

 남자는 여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일도 순조롭게 잘 풀리었다. 그러나 여인에게 때때로 실체 없는 그림자가 나타나선 마음을 휘젓곤 했다. 해서 입춘날이면 절을 찾아다니며 현재의 가족들과, 만리타국에서 살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해 촛불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어렵게 입을 떼고 들려준 사연이었고, 이 사연을 책에 실어주길 바랬다.

  그 밤은 여인의 얘기로 잠이 덧들고(*덧들다=선잠에서 깨어 다시 오지 않다) 말았다. 두 시 경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붙였으나 꿈결처럼 도량을 도는 목탁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여인은 어느새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개어놓고는 자리를 비운 뒤였다. 필경 관음전으로 들어가 기도를 올리려니 싶어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누웠으나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도 관음전으로 발걸음을 놓았다.

  짐작했던 대로 그녀는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려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들먹이는 어깨울음이 전류처럼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10년 동안 태백선 철로를 따라 다니며 저렇게 울었을 울음이었다. 사랑도 그리움도 오래 품으면 짐이 되는 것을, 저 미망迷妄을 지금껏 지고 있는가 안타까웠다.

  나는 황망히 관음전을 나왔다. 들썩이는 어깨를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등줄기에 고드름처럼 매달리는 연민으로 내가 먼저 무너지고 말 것 같아서였다. 여명마저 물먹은 어둠을 털어 내느라 그 날 새벽은 아주 더디게 열리었다.

 『달의 서곡』을 펴낸 지 7년 만에 출간준비를 하다 보니 그녀와의 약속을 더는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춘 날 절에서 돌아오는 대로 '지상의 방 한 칸'을 지었다. 방을 들이면서, 네 개의 벽으로 둘러쳐진 공간이 없어 사랑의 노둣돌을 놓지 못했던 그녀에게 늦게나마 '지상의 방 한 칸'을 헌사하게 되었다.

  부족하더라도 부디 이 방에 그 짐 부려놓고, 남은 길 가벼이 걸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일매 짓고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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