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천 개의 손을 가졌다. 스치고 간질이고 어루만지며, 할퀴고 부수고 무너뜨린다.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 움을 틔우고 입 다문 꽃봉오리를 벙그러 놓는다. 여인의 비단 스카프를 훔치고 노인의 낡은 중절모를 벗긴다. 그러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바람이 없다면 바다는 밤새 뒤척이지 않고 들판도 들썩이지 않을 것이다. 늦가을 늪지의 수런거림과 표표한 깃발의 춤사위도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물결치는 보리밭 이랑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달리는 자만이 거느릴 수 있는 바람의 푸른 갈기를 본다.
바람은 백가지 이름을 지녔다. 불어오는 시기와 방향에 따라, 그 성질머리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이 붙는다. 꽃샘바람 하늬바람 건들바람 같은 순한 이름을 지니기도 하고 고추바람 황소바람 칼바람 같은 매서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람은 변덕스런 심술쟁이다. 부드러운 입술로 꽃잎을 스치다 광포한 발길질로 뿌리를 흔들고, 억새풀 사이를 휘저으며 쉬익쉬익 지휘를 해 보이다가도 늙은 느티나무 가지 하나를 우두둑 분질러놓고 달아나기도 한다.
바람이 부리는 서술어는 열 손가락으로도 헤아리지 못한다. 바람 불다. 바람 들다. 바람이 일다뿐 아니라, 바람나다. 바람맞다. 바람피우다처럼, 사람과 관련된 표현들도 많다. 바람이 대자연의 기류현상만이 아닌, 사람 사이의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하는 일이 흥겨워 절로 일어나는 신바람이 있고, 짝을 지어 돌아야 신명이 나는 춤바람이 있다. 한국 여자들의 특허인 치맛바람처럼 한 쪽으로 쏠려 부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도시 복판을 관통해 가는 첨단유행의 패션바람도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오는 선거철에는 병풍이니 북풍이니 황색바람이니 하는, 수상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 풍경 너머에도 가끔은 그런 이상 기류가 발생한다. 마음의 허방(*땅바닥
바람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 제목일 뿐, 바람은 늘 흔적을 남긴다. 바람이 지나간 나뭇가지에 수액이 돌고 움이 터 온다.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가 달린다. 잔잔한 물을 흔들고 저녁 연기를 흩트리고 버드나무의 시퍼런 머리채를 흔든다. 멀쩡한 지붕이 날아가고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정지된 물상을 부추기고 흔듦으로써 자신의 실재를 입증하는 것. 그것이 바람의 존재 양식인 모양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밤, 밤새 전봇대가 울고 베란다 창문이 들썩거렸다. 무섭고 불안하여 잠을 설쳤다. 다음날 나는 아무 일 없이 달려오는 환한 아침햇살을 보았다. 세상은 평화로웠고 밤새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바람이란 지나가는 것이로구나.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것. 그것이 바람의 본질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람 앞에 흔들거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기다릴 일이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모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그렇게 서성이다가 바닐라 향처럼 사라져갈 가벼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바람이 아니다. 사랑이다. 아니 운명이다.
바람은 자유혼이다. 잘 곳도 매일 곳도 거칠 것도 없다. 여인의 옷깃을 스치고 히말라야 고봉 14좌를 스치고 카시오페이아의 성좌를 스친다. 에돌아 휘돌며 구석구석을 헤매다 식은 가슴 한 귀퉁이에 가만가만 똬리를 틀기도 한다. 세상의 어떤 울타리도, 도덕률도 그 고삐를 휘어잡지 못한다. 요정이었다가 마왕이었다가 제 성질을 못이기는 미치광이였다가 술 취한 노숙자처럼 한 귀퉁이에 잠들어버린다.
바람은 불사신이다. 죽은 듯 종적 없이 잦아들었다가도 하나의 나뭇잎을 흔들면서 조심스럽게 환생한다. 누구도 그를 본 자는 없으나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아도 바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마음이 한없이 떠돌 때마다 나는 내 전생이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소멸되지 못한 바람의 혼이 내 안 어딘가에 퇴화의 흔적으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머지 삶을 단숨에 휘몰아갈 광기와 같은 바람을 꿈꾼다. 그러나 이내 느닷없는 돌개바람에 휩쓸리지나 않을까, 팽팽한 부레 같은 내 마음 어디에 육중한 연자 맷돌을 매달아 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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