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 이른 새벽 기도를 하던 중,
지금 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전능자, 창조주이신 지는
정작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의 두 바퀴중 한 바퀴가 잘 돌아가지 않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창세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 가운데로 초청하시고 기다리시는 그 분을 만나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은 시와 그림의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라는 찬양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만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6V7XxK_bOM
오늘도 어제에 이어 이용규 선교사님의 <기대>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비자문제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투로
연거푸 가족의 문제와 사역의 현황에 대해 물으셔서 나는 짜증을 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난 네가 내려놓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내려놓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차 싶었다.
내 아킬레스건이 건드려졌다.
‘너는 책에 쓰고 설교하는 대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하고 있느냐?’ 이런 질문이었다.
나를 방어하고 싶었지만 변명이 되지 않았다.
나의 짜증스러운 반응이 실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떤 문제 때문임을 깨달았다.
나는 새로운 영역에서 내려놓음의 연습이 필요함을 느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이미 내려놓음에 대한 책을 써서 잘 알려진 저자가 내려놓는 삶의 기초에 충실하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했다.
책을 쓰고 이름이 알려지던 시기에 내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시 들고 있고,
내 안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음을 느끼지만
책 때문에 남들은 나를 높은 단계의 신앙인의 표본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가족과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내와 의견이 충돌해 불편한 마음으로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다.
나는 급히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때 내 자신이 껍데기에 싸여 있다고 느꼈다.
이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이런 생각이 마음에 차올랐다.
‘네가 다 내려놓은 자이기에 그 책을 쓴 게 아니란다.
너는 그저 내려놓고자 씨름하면서 그 방향으로 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지 않니?
하나님은 완전히 완성된 자만을 사용하시지 않는단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일련의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또 다시 내 약함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낙담에 빠져 있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약함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은혜’라는 단어의 깊이를 자각하게 된다.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당황하며 많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실까?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올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면
그 고통 가운데라도 그분의 은혜가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통이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주거나 힘들게 하시려는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불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자아를 낮추고 비워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새롭게 하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가나안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이 만난 기근이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경험한 어려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먼저 기근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우며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신 것도 사역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깨달아 아는 과정이었다.
내 계획이나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 그분께 내어드리며,
내 안에 높아져 있던 것들을 그분이 다루시고 만지시는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내가 이룰 일, 앞으로의 내 모습을 향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헌신이 이루어진다.
자신의 야망과 열정이 죽고 하나님의 소명이 다시 정립된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이 죽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대로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우리가 도구의 자리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의 성패는 ‘얼마나 이루었나’가 아니라 ‘얼마나 내어드렸나’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은 건 무엇일까?
그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후대에 이루어질 약속이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생전에 누린 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누리며
오직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약으로 주어진 외아들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선택을 하기까지 신앙이 성장했다.
그 결과, 인생의 후반부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고 그분을 누리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였다.
또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소득이자 복이 되었다.
그래서 어려웠던 시간까지도 자신과 믿음의 후손들에게 미치는 큰 유익이 되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립보서 1장 20,21절
주님, 인생의 기근과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그 과정을 통해 저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우며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소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누리며 사는 복된 삶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에서 형식에 맞춰서 드리는 예배가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입술로 찬양을 드리는 예배라면
삶의 터전에서 6일간 드리는 예배는
진리의 말씀에 실제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공동체안에서도 은혜받고
교회공동체밖에서도 정직과 성실과 나눔으로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거부 조콘다의 부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가장 초상화를 잘 그린다는 유명한 화가를 찾은 여인은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고 간곡하게 부탁 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을 힐끗 쳐다본 화가는 거절 했습니다.
“나 같은 화가가 그리기엔 당신은 너무 평범합니다.
나는 지금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골치가 아플 지경이니 돈은 상관없소.
저기 길 건너편에 일이 없어 한가한 화가가 있으니 그 사람이나 찾아가 보시오. ”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나 한가한 화가를 찾아갔고,
그는 여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 번에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한가한 화가가 그린 이 초상화는 ‘모나리자’라는 작품으로 세기의 명화가 되었습니다.
오늘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가 내 인생의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부지중에도 알아보게 하소서.
오늘 찾아오는 성공의 기회와 전도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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