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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밋밋함에 대하여/이상렬

by 안규수 2016. 8. 9.


    지금 시야에 펼쳐진 골목의 일상은 이렇다. 공터 낡은 의자에 앉은 노인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눅진한 표정 속에 그의 깃든 세월이 보인다. 얼마나 녹록치 않은 시간들이 저 얼굴을 스쳐 갔을까.
  골목 어귀, 파란 지붕 집엔 털 복숭이 큰 개 한 마리가 있다. 녀석은 나만 보면 짖어댄다. 제 눈에는 내가 악당으로 보이나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내 속에 악당 본성 하나 숨기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골목 맞은편에는 유치원이 있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다. 깊은 계곡물처럼 청아하게 들릴 때가 있는가 하면, 참새들이 떼를 지어 땍땍거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오늘은 참새 오천 마리다. 파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가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똑같은 집들의 회색 벽마다 권태로움이 묻어 있다.
  이것이 내가 사는 동네의 일상이다. 고요니 평화니 하겠지만 한마디로 밋밋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별스러울 것 없는 일상사를 펼쳐놓은 까닭은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이 진정한 인생 풍경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삶의 연속성을 보증한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살면서 나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맹탕’이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어떻다는 것도 아니고 어쩌자는 것도 아닌 그저 밋밋한 상태. 그 결과,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늘 자빠지고 추월당했다. 밋밋함, 오늘날처럼 특출함이 빛나는 세상에서 밋밋하다는 것은 지루함이나 세상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인기는 식고 사람들은 떠나고 매장은 텅텅 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선정적이고 더 특별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음식은 맵고 짜고 달아야 사람들이 몰리고, 상품은 보암직하고 탐스럽고 화려해야 시선을 끈다. 하여, 밋밋함이 주는 느긋한 평온이라든지, 침묵, 여유, 기다림은 우리에게 언감생심이다.

  이 시대에는 투사(士)  있어야 하겠지만 제 자리에 가만히 있어 주는 자도 필요하다. 진정한 용기란 온 세상이 다 흔들려도 그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묵묵함으로 그냥 있는 것, 허허벌판에서 누구의 박수갈채도 없지만 제 생명의 몫을 다하는 들풀 같은 삶이 아닐까.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사소한 몸짓, 작은 눈빛 하나들이 모여 거대한 생애를 쌓아올린다. 어느 소설가가 말했던가. “죽음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 인간 노릇을 제대로 못 한 것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라고. 밋밋한 일상으로 차곡차곡 걸어가는 길, 이게 인생인가 보다.
  세상은 이렇게 요란해도 마음에 고적을 누릴 수 있는 법, 밋밋함을 즐길 줄 아는 삶에서 온다. 변함없는 일상, 변함없는 이웃, 변함없이 내 곁에 있는 남편과 아내, 변함없이 찾아오는 사계절, 이것은 지겨움이 아니라 일상의 신비다. 어제 태양이 오늘 다시 떠오르고, 공중의 새가 저절로 날고, 골목어귀에 민들레가 제 몫의 생을 다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는가.
  내게 주어진 ‘밋밋한 삶’이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 내는 것이야말로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중심을 붙들어 매는 줄이다.
  나는 믿는다. 노파의 얼굴에 파인 굵은 주름살 하나도, 참새의 재잘거림 하나에도, 골목 구석 저 혼자 피어있는 풀잎 하나에도 저 별들의 운행에 버금가는 오묘한 신비가 담겨있음을.

  담벼락 위에 해가 걸렸다. 공터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가 떠난 텅 빈자리에 늙수그레한 고독만 덩그러니 앉아있다. 골목이 이렇게 미지근한데도 노을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노인의 내일이 궁금해진다. 

  다만, 내일도 그 밋밋함이 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렬의 수필' 감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