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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쑥 뜯는 남자/김성한

by 안규수 2016. 8. 9.


   많고 많은 기다림 중에서 봄나물은 가장 향긋한 기다림이다.

 오늘 아침이다. 아내가 느닷없이 쑥을 뜯으러 가잔다. 그러면서 검정 비닐봉지와 쑥 캐는 칼을 챙긴다.

  “그러지 뭐

  대답은 심드렁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퇴직 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데다 쑥국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촌스러운 식습관 때문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아내가 차에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다.

 

  오늘 갈 곳은 가야산이 굽어보는 고향 마을이다. 일부러 그곳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매연 풍기는 도심을 벗어나니 널따란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샘은 물론 잎 시새움까지 하며 심술을 부리던 날씨가 오늘은 잠잠하다. 길섶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실눈을 뜨고 있다. 개나리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슬레이트집 뒤란 하얀 백목련이 눈인사를 한다.

 

  차로 두어 시간 달려가니 저 멀리 고향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소잔등이 같은 능선에 에워싸인 고향 마을, 언제 봐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그 옛날 상엿집이 있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니 참 새미 골 초입 비알 밭이 보인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괭이와 삽으로 손수 일군 밭이다. 고구마도 심고 채소도 갈아 먹던 밭이 지금은 묵정밭으로 변해 버렸다. 그곳이 오늘 쑥을 캐는 장소이다.

  밭둑에 걸터앉아 쑥을 뜯는다. 양지쪽이라 그런지 쑥이 제법 새순을 틔웠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른 봄날인데도 쑥이 이름값을 하는지 쑤욱 올라와 있다. 쑥 캐는 일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그냥 손으로 뜯으니 잎은 찢어지고 뿌리만 남는다. 칼로 줄기를 베어보지만 이것 또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뜯어보자.

  “쑥 잘 뜯으소. 소 꼴 베듯 아무렇게나 캐지 말고.”

  역시 아내는 족집게이다. 삼십 년 넘게 한 이불 덮고 지내다 보니 뒷모습만 봐도 다 아는 모양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카이.”

  내 검정 비닐봉지를 펼쳐본 아내의 타박이 계속된다. 힘이 빠진다. 밭둑에 앉아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댄다.

  밭둑 돌 틈으로 삐죽하게 나온 민들레가 봄 햇살을 쬐고 있다. 민들레는 척박한 땅에서도 곧잘 뿌리를 내린다. 달빛 부서지는 강둑이든 도심의 보도블록이든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린다. 숱한 발길질로부터 밟히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하얀 씨앗을 발로 툭 차거나 입으로 훅 불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새로운 번식의 터전을 찾아 날아간다. 한계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의 풀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회는 높은 곳에,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를 낮추는 사람에게 잘 보이는 법이리라.

 

  저 멀리 아래뜸 들녘에는 하얀 비닐하우스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 유명한 성주 참외 재배지이다. 노란 참외가 비닐 속에서 자란다. 비닐은 비바람을 막아준다. 성가신 벌레도 덤벼들지 못하게 한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밟힐 염려도 없다.

  “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 비 오면 비에 젖을세라.”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온실 속에서 고이고이 자라고 있다. 그 옛날 노지(露地)에서 자란 개똥참외는 그렇지 못했다. 비를 맞으며 자랐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도 피하지 않았다. 생긴 모양새도 색깔도 볼품은 없지만 진득한 뒷맛은 있었다.

  문득 아파트 숲 속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이 비닐 속 참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꼬맹이 때는 말 할 것도 없고, 키 멀쑥한 중학생을 자가용으로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지 않나. 부모가 툭하면 학교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에게 이래라저래라 훈계까지 하며 따진다니.

  어느 유명회사는 신입사원 면접을 보기 전에 꼭 대기실을 둘러본다고 한다. 부모와 같이 온 지원자가 있으면 얼굴을 기억해두었다가 면접에 낮은 점수를 주기 위해서란다. 학벌이나 학점, 토익점수는 좋은데, 자발성과 독립심이 떨어지는 일명 마마보이들에게 일을 시키면 끝까지 해내려는 패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그럭저럭 하루해가 설핏하다.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시계를 보던 아내가 그만 집으로 가자고 한다. 아내의 쑥 보따리는 배가 불룩하다. 마누라의 굵은 허리통을 닮았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그냥 뭐

  아침에 나설 때와 똑같은 대답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아이구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 봐.”

  깔깔 웃는 아내 얼굴에 쑥 냄새가 배어 있다.

  산을 한참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멧부리 위로 얼굴을 내민 보름달이 쑥 뜯는 남자, 잘 가라며 환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