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닭 우는 소리를 읽고
이관희
1. 에세이
나는 수필문학 공부를 위한 조사 검토를 하던 중 우리 수필문학을 <포멀 에세이(fomal essay)>,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 등으로 나누는 것은 학문상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이론의 학문은 작품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문학 이론가들이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연구하여 '그것이 그렇게 되어지는 까닭'을 헤아려 가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 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수필작품들은 포멀 에세이나 인포멀 에세이 등으로 나누어 질 것이 아니라 크게 <에세이문학>과 <산문문학>으로 나누어 질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 문학의 정서는 서구적 개념의 에세이의 이성적 논의보다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정서를 쓰는 일을 작가들이 더 즐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서구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에세이가 서구에서 들어 왔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요. 한복에다 넥타이를 매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서구적 개념의 에세이는 문학인 사회의 문학이기 보다 일반 사회 각 방면의 전문인들의 글쓰기 문학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간 신문의 칼럼이나 사설등이 될 것입니다.
나는 종교인으로서 종교적 에세이를 쓰는 일을 나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만 요즈음은 창작문예수필을 위한 일도 또 하나의 사명인 줄로 알아서 이쪽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연유로 나는 우리 수필문학을 세가지의 양식으로 구분해 보는 것이 우리 현실과 맞다고 생각 합니다. 즉 우리 작가들이 쓰는 작품은 <에세이문학> 작품이거나 <산문문학> 작품이거나, 그리고 지금 막 시작한 <창작문예수필> 작품 세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새벽닭 우는 소리>는 에세이 작품으로 보았습니다.
환경 파괴 문제를 토의하는 형식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에세이는 '있는 것의 토의의 문학'이라는 것이 문학이론상의 정의 입니다.
'이미 있는 것'이란 환경 파괴 문제처럼 우리 현실 문제에 이미 있는 문제를 의미 합니다.
'토의'란 이미 있는 문제를 가지고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있는 것의 개선책을 구하는 형식의 글을 의미 합니다.
창작이란 간단히 말해서 <이것(소재. 이미 있는것)을 가지고 저것(아직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벽 닭 우는 소리>는 환경 파괴라는 '이것(소재. 있는것)'을 가지고 현실적인 걱정을 하다가 "자연의 소리가 회복" 되기를 기대하는, 있는 현실의 개선을 기대하는 것으로 종결어를 맺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든 것이 없습니다. 즉 환경 파괴 문제를 놓고 몇가지 실예를 들어 가며 토의를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에세이 작품 입니다.
2. 구성
모든 문학의 성립 조건은 글의 구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문학작품이 아닌 일반 사회의 어떤 문서라도, 심지어 회사의 기획안 조차도 구성이 안 되어 있으면 상사로 부터 꾸중을 듣게 됩니다. 하물며 문학 작품이겠습니까.
문학 작품의 생명은 구성에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신기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더라도 글의 구성이 안 되어 있으면 문학성을 성취 할 수 없습니다.
<새벽닭 우는 소리>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다룬 에세이 작품 입니다.
환경 문제를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접목 시켜서 서두를 열고 종결어에서 이를 받아서 새벽닭이 우는 자연의 소리가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매우 매우 잘한 구성입니다.
많은 수필작가들이 서두에서 던진 화두를 잃어 버리고 무슨 글을 쓰려고 글을 쓰고 있는 지 알 수 없이 헤메어 다니다가 서두에서 던진 화두가 아닌 엉뚱한 소리로 종결어를 맻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변잡기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닭 우는 소리로 서두를 시작해서 종결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받아 낸 것은 두 사람이 정구 공을 잘 던지고 받는 형식의 아주 훌륭한 구성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본론 까지의 거리가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 작품의 본론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나날이 달라지는 환경----" 이하 입니다.
이 본론에 이르기 전까지를 '서두문단'이라고 합니다.
서두 문단은 가능한 독자로 하여금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흥미를 유발 할 수 있는 흥미유발의 짧은 문단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두에서 부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한참 헤메게 되면 독자들은 책을 덮어버리고 맙니다.
이 작품은 서두 문단이 필요 없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두번째 구성의 문제는, "어느날 아침이었죠.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이하의 문단은 뒤로 가져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문단은 "봄이 오면 머나 먼 남쪽나라에서 찾아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재잘대던 제비" 문단 다음에 갖다 붙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래야 "논두렁에서 날쌔게 숨는 숨바꼭질의 명수"라는 말을 받아서 '두견해 울음소리를 그치게 한' 침입자의 방해가 실감나게 되고 또한 다음 문장에 이어지는 "숲속 최고의 소프라노 꾀꼬리"의 이미지에도 손을 맞잡는 형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구성의 문제점은, "쪽박 바꿔줘"라고 우는 두견 새 삽화가 지금 있는 그 위치에 들어갈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삽화는 종결어를 준비하기 위한 '위기 문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즉 이 문단을 "이처럼 새들이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가는---" 문단 다음으로 가져와 보십시오. "황무지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을까요" 다음에서 "쪽박 바꿔줘"의 삽화를 읽게 되면 독자의 머리 속에 이때까지 말 해 혼 환경 파괴의 문제가 그림처럼 영상으로 환하게 떠 오르게 됩니다.
동시에 다음에 오는 문장 "자연의소리가 아닌 인위적 소리 ---- 광화문의 촛불"이 "쪽박 바꿔줘" 의 자연의 애절한 소리와 비교 되면서 종결어에 힘을 실어 주게 됩니다.
3. 종결어
수필문학은 그것이 에세이 작품이든 산문작품이든 창작문예수필 작품이든 서두와 함께 종결어에 목숨을 거는 문학 양식입니다.
서두에서 독자를 잡지 못하면 그 작품은 없는 작품입니다. 종결어 까지 독자를 잘 이끌고 와서 죽을 쒀 버리면 독자는 욕을 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괜히 시간만 버렸다고.
이 작품의 종결어는 "자연의 소리를 회복 할 날을 기대해 봅니다"에서 글을 맺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붙여 놓은 "이곳 동산" 이하는 사족입니다. '닭 우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 가 충분히 받아 안고 있습니다.
4. 퇴고
서두와 종결어에서 지적을 받은 외에 구성에서도 지적을 받았다는 것은 이 글은 쓰는 것 만으로 완성된 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즉 충분히 퇴고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닙니다. 고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문학교실 학생들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 완성하려고 합니다. 충분히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은 써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면 고치는 데는 3개월 이상 10년도 걸릴 수 있습니다.
새로 쓴 글은 발표하지 않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보통 몇 달에서 몇 년 동안도 묵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어버린 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을 때 그제서야 잘못된 부분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첫 대면을 마치고자 합니다. 참고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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