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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정승윤의 「도편산문」을 읽고/박 춘

by 안규수 2018. 12. 9.

정승윤의 도편산문을 읽고

박 춘

 

 

  "한 사람의 작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얻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표현에 이르지 못했을 인간 진실의 새로운 광학을 발견하는 일이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그 처녀지로 들어가보자.” 정승윤의 수필집도편산문을 펼치며 떠오른 글귀다. 평론가 정홍수는 평론집소설의 고독에 그렇게 써 놓았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무수히 많은 무엇인가를 경험에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비축해 놓은 사람일 것이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보다 좀 더 깊은 관심으로 사물과의 관계를 바라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 속에 간직, 저장해놓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삶을 좀 더 열정적으로 자신의 심연에 심어놓은 것이다. 문학은 결국 간직하고 있던 그것들이 스스로 발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무엇인가를 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 싶은 기왕에 축적되어진 것들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고, 축장된 그것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하나의 글은 작가가 간직한 경험들이 작가가 감응한 대상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한 순간의 순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은 우리가 가진 체험적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체험을 빌린 시적 감응. 형상의 재해석. 근원으로서 귀환의식 같은 껍데기를 깨는 일이다. 내면을 보는, 숨겨진 근원적 그 무엇. 침묵의 목소리를 들어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어떤 지경을 포착하는 시선을 가진 사람은 최소한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맨발로 서 있어야 한다.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정승윤은 일찍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 같다. 그는 어쩐지 그래야한다는 필연을 가졌을 것만 같다. 그리고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를 재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도편산문 첫 장을 넘기며 떠오른 생각이다.

   지난 6월 여름이 시작될 무렵의 일이다. 순천에 계시는 안규수 형께서 전화를 주셨다. “자네 정승윤 선생의 수필집 도편산문을 보았는가? 내가 지금 한 권 보낼테니 읽어보게. 자네한테 매우 유익할 것이네.” 그리고 이틀 후 책은 내 책상위에 놓였다. 형은 무엇이든 내 문학수업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분초를 다투신다.

 

   도공이 몇 천도 고온을 견디고 나온 도자기를 거리낌 없이 파쇄 하는 것을 보고 저럴 때의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헤아려본 적이 있다. 남들에게 주면 애지중지할 수도 있는 귀한 도자기를 무슨 마음으로 아무 주저함이 없이 깨뜨릴 수 있을까. 그는 아마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들은 남겨두지 않는 것이 도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자신의 손으로 땀 흘려 빚은 도자기를 깨뜨리기란 내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씌어지는 내 산문들을 볼 때, 마땅히 깨뜨려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의 파편처럼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옳은 일일 것이다. 내 산문은 어쩌면 파편의 숙명을 지니고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내 산문은 오롯하고 응축된 도자기라기보다는 깨어져 흩어져 있는 파편에 가깝다. 그러나 대지위로 달이 뜨면 그 파편들은 슬픔처럼 반짝 거린다. 보다 더 완미한 가치를 꿈꾸며, 새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도편산문 전문)

 

   ‘그는 아마 자신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작품들은 남겨두지 않는 것이 남은 도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우리가 가진 도공과 도공이 빚은 도자기에 대한 인식이 나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식. 장인정신이라는 순정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준에 미흡한 작품을 파쇄 하는 것이 단순히 남은 도자기에 대한 가치척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작가 정승윤이 모를 리가 없다. 남은 도자기의 가치 때문이 아니고 작품에 대한 자긍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지순한 열정, 삶에 대한 예의라는, 심리적 거북함과 항의를 생각 못할 리가 없다.

   경제학적인. 가치나 기준이라는 언어가 더군다나 높이는 것이라는 인식과 결합할 때, 문득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연상시키고, 마치 내 주머니 속의 금의 가치는 상대가 얼마만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인가에 달린다는, 효용에 의해 가치척도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으쓱대는 듯하다. 또 반듯이 그런 희귀성으로만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명징함도 스멀거린다. 그런데도 굳이 어쩌면 피해야할지도 모를 언어를 선택해 놓았다. 분명 뼈 하나를 품었을 것이다.

   라캉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대상은 인식론적 대상이기 이전에 욕망의 대상이 된다고, 인간존재를 욕망으로 정립했다. ‘신도 절대선도 다 욕망의 원인이다.’ 라고 썼다. 얼굴을 붉히고 변명하고 싶은데 그게 허망한 짓임을 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태도는 변명은커녕 설명의 의욕마저 무참하게 꺾어 놓는다. 이미 진부하고 진부해서 신자유주의경제가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스운 꼴임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차라리 똑똑한 놈이 이쁜 놈 못 당하고, 이쁜 놈은 부모 잘 만난 놈 못 당한다.’ 라는, 이마저도 진부해져버린 속언을 재탕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작가는 우리의 남루한 삶의 태도에 대해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의식적으로 철저한 합리성을 대표하는 가치라는 언어로 항의를 궁리했을 것이다. 도편과 구름과 안개. 불두. 그리고 잠자리. 진달래. 상징과 상상과 직관의 강과 언덕을 이룬 산문이 문득 상쾌해졌다. 진창을 이룬 땅이 산문을 이룬 바탕임을 말해주고 있어서다. 그가 구름을 말하고 안개를 피워 올리고 선문답 같은 불두나 지평선을 호명하는 것이 다름 아닌 진창을 이룬 대지를 안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유쾌한 것이다. 산문의 출발이 일인칭에서 시작하고 일인칭으로 만족하는 것을 벗어나, 내가 나이기 이전과 나 말고 너와 그가 함께 동반하는 모습을 구도하려는 의지가 반가운 것이다.

   잠시 한눈파는 이야기겠지만 한 때 지도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반도가 거대한 대륙과 대양을 양 날개처럼 거느리고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부도를 들여다보면 왠지 흐뭇한 것이다. 조금 커서야 한반도가 거대한 대륙의 동쪽 끝. 대양의 변두리 외진 한 점에 있음을 인식했다. 가끔 쓸데없는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세계는 중심부의 의지에 의해 구조화된다. 그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중심부에 요구되는 만큼의 유익해야하는 경제구조다. 이미 지구촌은 중심부의 세계정책과 경제정책이 곧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냥 슈퍼 파워. 팍스 아메리카나의 경제정책방향이 곧바로 한반도의 경제정책이나 매양 같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미국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불합리가 심화되어 다른 대안적 경제사상과 그것을 바탕한 정책이 확립되지 않는 한,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구조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전후세계를 브레턴우즈체제로 안정화 시킨 케인즈언의 사상과 경제체제가,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이 심화되자 스스로 활로를 찾고 열었듯이 신자유주의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가진 대부분의 결핍은 자신들이 지닌 욕망 때문에 생겨난다고 한다. 그러한 결핍은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항거불능의 것이다. 그렇듯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가져오는 주변부로서의 한계와 제약을 극복하기란 마찬가지로 항거불능에 가깝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고심만이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내가 거론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이유도 없는데 하고 만다. 주제를 모르는 탓이다.

 

   차를 세우고 친구들이 약수를 받는 사이에 나는 산 쪽으로 몇 걸음을 더 나아갔다. 높지는 않았지만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산이었다. 산 위를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에 선 소나무 몇 그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이 피어올랐다. 이곳 아래는 바람도 없이 잠잠한데 위쪽으로는 바람이 부는지 구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부풀면서......(중략) 이런 구름을 만나려면 푸르고 명징한 하늘이 있어야하고 올려다 볼 하늘이 있어야하고 그리고 바람이 이는 소나무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구름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한다. 서로 살아있을 때, 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고, 꽃이 피어있을 때 꽃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고, 구름이 피어날 때 구름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다. 그러나 그 인연이란 것도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구름은 오로지 지상에서 나 하나를 만나고 나서 순식간에 소멸해 버리는 건 아닐까. 온 하늘에 스며들 듯 피어나지만 사라지는 건 순간이다. .... 그 바가지의 물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고여 있었다. (구름)

   어디선가 보았을 법도 하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보았고, 느꼈고, 은근한 탄식도 했을 것이다. 바람이 스치고 하늘은 파랗고 외로 튼 소나무가 있고, 약수터가 있는 산굽이. 친구가 있고, 건네고 건네받는 삶의 고임이 물씬댄다. 그리고 하늘에 스며들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았고, 한 순간의 정적은 나를 훔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한 순간의 지경은 남아 이미 누구에게는 뼈가 되었을 것이다. 인연과 소멸은 약수를 건네는 손과 손을 따라 떠돈다. 그 모든 감정이 용케 견디고 있다. 이미 심연은 허망한 것인지. 이보다 더 허황한 것이 어디 있으랴. 고 뜨거워지고 말았지만, 다만 그 바가지의 물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고여 있었다.’ 고 써야했을 것이다. 그 안간힘이 차라리 매정스럽다.

   정승윤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의 글은 작고 낮은 읊조림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시선에 잡힌 사물의 모습. 시선에 드러난 사물과 행동을 단순하게 호명하여 나열시킨다. 지극히 사실적인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행동이 더해가면서 그것들의 수런거림이 모여든다. 이상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이입 없이 불러준 호명이 하나의 생각의 틀을 형성해간다. 호명이 더해질수록 그것들은 스스로 말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서 발화되어 토해지는 전언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호명한 사물과 실재적 묘사에 그친 행동들이 전언의 꼴을 이루어내게 하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모호했던 것에서 명징한 것으로, 작은 수런거림이 큰 소리로 울림을 키워낸다. ‘차를 세우고 친구들이 약수를 받는 사이에... 가만히 따라가 보라 그지없이 편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어디에도 화자의 감정이입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따라가다 보면 그것들은 어떤 형상을 그려간다. 그리고 작은 수런거림들이 제법 소리를 키워내며 그의 감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림에서 보는 원근법의 효과나 울림통의 증폭효과처럼, 사실적이고 단순하게 호명하여 나열시킨 그것들이 점점 커지고 명징함을 더하며 그 무엇을 토해낸다. 손에 쥐어지듯 눈앞에 보이듯, 사물과 사건들의 관계를 정밀하게 재현시킨 그것들이 은유의 수단이 되어 흐름을 끌고 간다.

   어디에선가, ‘길가에 구르는 흔하디흔한 돌멩이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읽으면 작가의 내공을 짐작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 사랑이니 이별이니 구름. 노을이니 하는 범속한 제목을 흔들리지 않고 쓰는 작가를 보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고 써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 수없이 그런 제목으로 글을 썼고, 누구든 심중으로 다진, 다짐의 말들이 이미 인류에 회자되어 있어서다. 독창성과 자신이 발화시키는 심연의 모색에 그만큼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잠자리가 큰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거나 한여름 볕을 즐기는 성 싶었다. 가벼운 날개와 무거운 바위는 아주 오랜 인연처럼 보였다. 저 바위가 생긴 이래 과연 얼마나 많은 잠자리들이 저 바위를 스치고 지나갔을까. 잠자리가 스쳐간 흔적을 우리는 겁이라고 불렀던가. 겁이 흘러도 세월은 여전히 무심 할 것이다. (하략). (잠자리)

 

   우리네 산하에는 큰 산. 작은 산. 그것들이 만들어낸 계곡과 개울이 어디에서든 올망졸망하기도 하다. 계곡은 아래로 개울을 이루고 큰놈 작은놈 모난 놈 평평한 놈 벼라 별 바위가 옹골차다. 한 여름의 땡볕과 개울과 반듯이 하나쯤은 분명한 너럭바위는 있어야 한다. 한여름 달궈진 너럭바위는 산촌의 악동들에게 엄마의 품같다. 계곡물에 차가워진 악동들의 몸을 덥혀주는 탓이다. 산촌악동들의 시선에 우주란 별거 아니다. 산과 땡볕과 잠자리와 개울. 그리고 벌거벗고 새카맣게 익은 그들의 몸뚱이다. 그들에게 세계의 의미와 우주의 경계를 물을 이유조차 없는 일이다.

   한여름 볕과 큰 너럭바위와 잠자리 한 마리와... 풍경이 화자의 시공간에서 하나의 인연과 세월의 무게로 발화되고 있다. 순명한 세계가 열려지고, 그것들의 경계가 없어지며 하나의 순간일지도 모를 순수로 열려간다. 새카맣게 익은 산촌 아이들의 몸뚱이가 너럭바위에 모로 누워 귀를 대고 있듯, 풍경 하나가 화자의 시공간을 열어 간다. 그가 가진 독특한 읊조림으로 열리고 있다.

 

   그녀는 골목길에 살았다. 그 골목길은 호젓하고 좁았다. 비교적 인적도 드물었다. ....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도 그 골목길을 자주 들렀다. 심지어 그녀가 이사를 가고 나서도 그 골목길을 둘러보곤 했다. .... 삶은 때로는 우리를 절망케 한다. 정말로 절망으로 인하여 죽고 싶을 때가오면, 나는 꼭 두 곳을 둘러보리라 결심한 적이 있었다. 고향 앞바다와 그 골목길이었다. ....

왜 그때 구름을 보면 가슴이 아팠던 것일까. 라일락이 있던 집의 지붕위로 뭉게뭉게 일어나는 흰 구름을 보면 왜 까닭 없이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 것일까. 구름이 점점 피어날 때 나는 그 루름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구름도 나처럼 아파하는 것을 느꼈다. 좁은 골목으로 라일락 향기가 흘러갔다. 숨이 막힐 듯이 진한 향기였다. 나는 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었다. 그러나 구름은, 숨길 수 없는 첫 사랑처럼 자꾸만 가슴을 풀고 부풀어 올랐다.(골목길}

 

   호젓하고 좁은 골목길이 있고, 그녀가 살았다. 그리고 구름과 라일락. 흰 구름 하나가. 벗어날 수 없는, 그것들이 없었다면 무의미했을 청춘이 있다. 지구에서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지를 찾아가고 있다. 그 골목길에 그녀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충만했다고 고백할 수 있음은 또 얼마나 지순해져야 하는 것일까. 그래, 그러면 되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애먼 땅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면 된 것이다.

 

   정승윤의 글 세계는 체험을 빌려 사실재현을 구하는 서사화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서 새로운 것, 유일한 것들의 발견을 추구한다. 심호흡을 하고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 온 몸의 감각을 곧추세워 진창을 찾고, 영원한 찰나를 붙잡으려 한다. 그가 그린 글의 세계, 맛과 멋은 배열된 전체의 문맥에서 살아난다. 극히 절제된 나열들이 공명을 이루며 그의 시선에 드러난 것들에 당당한 품위를 갖추게 한다. 자신의 말을 그것들에게 전언하도록 만들어 은유의 참맛을 느끼도록 만든다. 비움과 채움의 역할도 크다. 그것들이 그려내는 여운이 참 좋다.

   나는 젊어 한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향원익청香遠益淸(근원적 애모와 존중하는 마음가짐이란, 멀리 있어도, 세월이 흘러도 그에 대한 마음의 허락은 점점 깊어지고 짙어지는 것이라는)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수놓고 세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언어들이 도편산문을 읽어가는 동안 가슴 한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20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