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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안규수의 ‘엄나무 가시’를 읽고

by 안규수 2019. 5. 28.

  안규수의 ‘엄나무 가시’를 읽고

                                                                                                     박 춘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답을 구하는 행위다. 스스로의 의식세계를 확장한다. 실은 그 과정에 철학이라는 표현 없는 철학이 내재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문학은 상처의 이야기다. 기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와 상처가 세월을 지나 진실이 되어 스스로 발화하며 치유하는 세계다. 수필은 자화상이다. 자기를 찾아가고 증언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보하고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글의 틈새에 사소해 보이는 무엇을 숨기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찾아내 줄 것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수필은 삶에서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자 헌사다. 한 사람이 말하기 힘들고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제 토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정화되겠다는 지각이기도 하다. ‘엄나무 가시’는 한 사람과 한 집안의 개인사와 근현대사가 함께 들어있다. 화자에게는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사회사적으로는 일제치하까지 연결되고 있다.


까끔골. 학 날개처럼 길게 늘어진 노강산 자락 아담한 산골 이름이다. 감나무 과수원과 올망졸망한 밭이 천여 평 있다. 그 땅은 한 여인의 땀과 눈물이 젖어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여인은 감나무를 가꾸고 채소와 감자, 고구마를 경작하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구슬땀을 쏟으며 살았다. 여인은 스물둘 한창 나이에 마흔이 넘은 남자 소실이 되었다. 가난한 친정집 가족 생계를 위해 들논 서너 마지기와 운명을 바꾼 것이다. 여인은 해방 이듬해에 4대째 독자인 집안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그런 경사가 없었다. 남편은 먹고 살 만큼 문전옥답과 까끔골 과수원과 밭을 여인에게 주었다. (.....)

태평양 전쟁 때, 동네 꽃다운 처녀들이 정신대로 끌려가자 여인의 아버지는 겨우 열일곱 살이 된 딸을 동네총각에게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갓 스물의 신랑은 신혼 육 개월 만에 일제에 강제 징집당하고 남양군도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엄마는 그렇게 떠난 첫 남편의 제사를..... (엄나무 가시)


  화자 자신의 이야기를 3자적 시선으로 글을 열어간다. 수필작품에서는 드믄 경우로 보인다. 자칫 직접적인 핍진한서사로 인해 부딪힐 수도 있는 문장의 부담을 해소시키고 있다.


엄마가 평생을 머리를 감싼 수건을 뒤꼭지에 단단히 여미는 이유와 가느다란 몸체를 항상 긴장된 채 꼿꼿했는지를.... 농익은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아들을 하나밖에 낳지 못했다는 죄 아닌 죄로 소실에게 남편을 보내놓고 소실아이를 보듬어 안고 잠들어야 했던 큰엄마의 삶도....


  삶이란 무얼까.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이고 자식에게 부모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한도 끝도 없는 인연의 실타래다. 운명이고 순환의 질서에서 벌어지는 약여躍如한 최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엄나무 가시’는 물을 필요도 없고 대답할 것도 없는 어리석은 물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불가피성을 무엇 무엇에 의탁하고 통과하려는 새삼스러운 짓인 거라고 나무라는 듯하다.

  부모란 일방통행로를 가는 순례자다. 자식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와 결과들이 자연 그렇게 되어진 것, 그리 되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아기 때부터 길들여진 노릇이니 그렇게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버릇은 자신이 어미와 아비가 되고서야 간신히, 정말 간신히 경험측에 의해 되돌아보게 된다. 온몸을 쥐어짜는 감사와 회한은 한참을 더 살아내야 한다. 그다음에야 자신의 모든 것이 어미와 애비가 온몸에 가시를 촘촘히 곧추세우고 키워내고 물려준 것임을 겨우 알게 된다. 부모와 자식사이란, 자식이 일방통행의 순례자로 들어서고 그 길을 걷고, 의미를 깨득하고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부모가 걸었던 순례자의 길을 뒤따라 걷는 것이다. 그 길에서 몸과 마음을 애태운다는 것이고, 열정을 배우고 나눈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순례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과정이 그를 변하도록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의 글이 주는 지식과 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막막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길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앞서 걷는 사람의 인기척과 발걸음소리다. 누군가의 글은 발걸음소리이고, 그 글을 읽는다는 것은 발걸음소리를 듣는 것이다.


엄나무순은 쌉쌀하고 달콤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맛 때문에 사람은 물론이고 초식동물들초차 숨넘어가게 좋아한다. 이렇다 보니 엄나무는 여린 새잎을 지키려고 가지에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히 세운다. 엄마도 엄나무처럼 가시를 곧추세우고 살아왔을 것이다.


  산의 계곡이든 산자락 끄트머리든 엄나무는 볼 수 있다. 온 몸에 가시를 촘촘하게 두르고 미색의 몸뚱이를 곧추 세우고 있다. 촘촘히 달고 있는 가시는 새싹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항거일 것이다. 엄나무에 돋는 새싹을 보고, 촘촘하게 두르고 있는 가시를 보고,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두루 서러운 사람이다.

  그는 엄나무를 보고 그 가시가 가졌을 염원을 생각하고 불현듯 덮쳤을 회한을 떨리는 손으로 적었을 것이다. 엄마와 큰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두 엄마의 삶을 내리받은 것임을. 엄나무 가시는 여기저기 흐릿해지고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을 일으켜 세우고, 눈물겨웠던 날들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쓴다는 것, 기필코 쓴다는 것으로 그 험난했을 과정을, 안쓰럽고 측은했을, 지극히 인간적인 도리에 헌사 하는 것이다. 그 삶들을 보듬고, 돌아보며 위로하는 마음이 깊고 면면하다. (201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