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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해답입니다

by 안규수 2021. 3. 2.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해답입니다.

 

가정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우기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과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가족의 종이 나다'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어머니의 종으로, 남편의 종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그리로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행복의 길입니다.

 

직장이나 학교, 친구 사이에서도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생활을 합시다.

처음에는 힘이 들고 사람들이 무시할지 몰라도

곧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섬김의 삶을 살아 가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천하 모든 입이 섬김의 종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나눔 본문중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조동천 목사님의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가지 질문> 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파트2. 어떻게 살 것인가? 02. 삶의 주도권을 말씀에 넘기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뛰어 내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은 누구의 소리입니까? 마귀의 소리입니다.

마귀가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91편에는 “뛰어내리라" 는 명령이 없습니다.

 

이처럼 말씀에도 없는 내용을 편리한 대로 적용하는 것이 성도들이 자주 당하는 두 번째 유혹입니다.

 

도대체 우리 삶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에 내 삶을 맞추어야 합니까?

아니면 내 삶의 필요에 말씀을 맞춰야 합니까?

말로는 말씀에 내가 맞춰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삶은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인간은 너무 쉽게 내 삶에 말씀을 끼워 맞추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당연한 듯이 생각합니다.

어려운 순간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말씀을 방패 삼으려 합니다.

우리 삶에서 말씀의 역할은 그런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입니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만들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을 학대해서라도 그것에 자기를 끼워 맞춥니다.

제도를 만들고는 제도의 종이 되고, 돈을 만들고는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을 창출하고는 그 권력에 지배 당합니다.

이렇듯 주도권이 늘 뒤바뀌는 것은 사탄의 하수인이 된 죄인인 인간의 노예적 근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한때 크게 히트 친 DDR(Dance Dance Revolution)은

일본 코나미의 평사원 다나카 후미아키(田中富美明)처음 아이디어를 낸 뒤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한 것입니다.

다나카 덕분에 코나미는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이 득세하는 중에도

매출 83%, 경상이익 640%가 증가하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그런데 이 DDR 열풍은 미래 인류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기계를 원하는 대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기계의 신호에 따라 인간이 온몸을 비틀며 춤을 추어야 하는 어릿광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계의 지시에 따라 얼마나 춤을 잘 추느냐로 점수가 매겨집니다.

어떤 사람은 한밤중까지 기계에 몸을 맞추려 땀 흘려 연습했다고 합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의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 웃지 못할 코미디가 펼쳐진 것입니다.

 

이런 경험에 익숙한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피조물인 인간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뛰어내릴 테니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현장들이 포착됩니다.

시험공부도 하지 않고 만점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든지,

신호를 위반하고는 경찰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한다든지 찾아보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변해야 하는 것, 반성해야 하는 것, 움직여야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이지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여기저기 가위질해서

편리한 대로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기대하지 않은 행동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을 인용해 마귀에 게 대적하신 것입니다.

주(主)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주종(主從)을 뒤바꾸어 놓은 마귀의 무질서를 주종을 분명히 함으로 질서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이시고, 인간은 종입니다.

말씀의 밑그림에 내 생을 모자이크해야지, 내 욕심을 밑그림 삼아 말씀을 조각내 모자이크하려 하면 안됩니다.

말씀의 신호에 내가 춤을 추어야지 말씀이 내 발에 따라 움직이게 해선 안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거의 3천 년 전의 이 말씀이 DDR의 원조인 것 같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의 불빛과 신호를 따라내 발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발 한 발 딛는 것이나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나 모두 말씀의 빛, 즉 신호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두 가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입니다.

두 가지 거센 바람은 하나님의 바람과 마귀의 바람입니다.

당신은 어느 바람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말씀의 신호에 따라 살아갑니까, 아니면 욕망의 신호를 따라 살아갑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잘 살펴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해선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의 방향을 따라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향하는 주님의 눈빛은 잠시도 흐릿해 지신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 성전 위에서 예수님께 뛰어내리라고 요청합니다.

사람들은 한강 다리 위에서 실연을 당해 자살하려는 청년을 바라보듯

성전 꼭대기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드다(행 5:36)라는 사람은 여호수아처럼 요단강을 쳐서 가른다고 했고,

마술사 시몬(행 8:9)은 공중을 난다고 하면서 메시아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드다나 시몬이나 또 그들을 추종한 사람들이나 메시아를 이런 식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사탄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인 광야의 시험에서나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고까지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니 반드시 하나님이 구원해 줘야 한다고 압력을 넣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 27:43

 

하나님의 아들의 삶은 뭔가 특별한 보호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도 내 뜻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이처럼 세풍은 거세게 우리를 몰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칼에 그 싹부터 잘라 버리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에게 십자가 외의 모든 길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이고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를 막아 섰을 때 꾸짖으며 사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하나님의 방향과 사람의 방향이 이처럼 다름을 주님은 명백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기세로 당당하던 베드로 같은 사람도 단 몇 초 만에 사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상관없는 길이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알았을 때 자신을 위해 오직 한 가지만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일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 17:2).

그 길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라 마 16:24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성도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도권을 분명히 하십시오.

DDR(Dance Dance Revolution)의 법칙이 아니라

BBR(Bible Bible Revolution)의 원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의 목표이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는 이유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자기 확신을 내세워 하나님을 협박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확신은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과 상관없이 믿는 것이고,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에 근거한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4)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휘둘렀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예언된 대로 십자가를 지는 그 길을 가시기 위해 그 칼을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말씀의 틀에 짜 맞추어 가신 것이지,

말씀을 자기 삶에 짜 맞추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말씀이었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푯대를 향하여 전심전력으로 달려갔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바울은 자신의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곧 말씀을 좇아갔다고 합니다.

성도는 이처럼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인생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말씀을 좇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결국 성도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하나님의 복음에 두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방법이나 기적으로 사명을 감당하시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지내셨고,

먼지 자욱한 팔레스타인 땅을 피곤하도록 걸어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쉬운 길을 기대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기도만 하면 대학에 척척 붙고 좋은 직장에 다니면 만사가 형통할 줄로 압니다.

모두가 놀라며 흠모하는 영웅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5-8).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해답입니다.

 

가정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우기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과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가족의 종이 나다'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어머니의 종으로, 남편의 종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그리로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행복의 길입니다.

 

직장이나 학교, 친구 사이에서도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생활을 합시다.

처음에는 힘이 들고 사람들이 무시할지 몰라도 곧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섬김의 삶을 살아 가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천하 모든 입이 섬김의 종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학생은 기도하고 연필을 굴리면 정답이 나오는 기적의 성적표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신이고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노력하고 시간을 아끼며 애쓰는 근면함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인생이 되길 바라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삶이 되길 바라십니다.

그렇게 말씀이 내 삶에 체화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말씀을 시험하지 말고 말씀이 실현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읽을 말씀 : 디모데전서 2:1-7

 

노르웨이의 산골 마을에 페르귄트라는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 솔베이지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페르귄트는

큰 부자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해외로 떠났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한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이미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기다릴까 두려웠지만 아내를 잊을 수 없던 페르귄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을 만나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10년이나 허송한 세월에 더 빈털터리가 되어 차마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던 페르귄트는

몇 년을 더 방황하다가 도저히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고향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아내는 언젠가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밤에도 환한 불을 켜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솔베이지의 노래’라는 가곡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며 사랑을 지켰던 솔베이지보다 더 큰 사랑으로

주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계시며, 잃어버린 한 영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영혼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만방에 전하십시오. 아멘!!

 

주님!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영원한 주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노래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