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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겨울 산은 잠들지 않는다

by 안규수 2021. 10. 11.

 

   겨울이 간직한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한라산 산행의 출발점인 성판악에 섰다. 한겨울 산행이기에 유달리 긴장되었다. 시간은 새벽 5시를 넘어서 여명이 느껴지지만 말갛게 늘어선 나무 사이로 별들이 총총하다. 희미한 길이 열리자 걸음도 덩달아 빨라지고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솔밭 대피소를 지나 사라오름 입구를 뒤로하고 비탈에 올라서니 붉은 햇살이 마른 나뭇가지 위로 곱게 퍼지고 나무 그림자들이 눈 위에 부챗살 금을 긋고 있었다. 그림자는 차가와도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 한 점 없는 숲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굴거리 나무만 죽은 듯 검게 늘어져 있다. 나무에 쌓인 눈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진달래대피소에 오르니 사방이 눈 세상이다. 눈은 이내 녹기 때문에 아름답다. 사라지는 것이, 끝까지 버티며 어지럽히는 것보다 몇 배 더 아름답다. 사람들 동심이 되어 눈밭에서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즐거움이 모여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즐거움을 사진 속에 담아가며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는 일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온통 흰빛 세상이다. 정상이 부드러운 등을 보인다. 손끝이 닿을 듯한 저 능선만 오르면 더 오를 곳이 없다. 구상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상고대 눈꽃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구상나무는 온통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장승처럼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세찬 바람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름의 눈길이 어찌나 힘든지 쓴맛이 입안 가득하다. 백록담을 향하여 오르는 긴 계단 길 모두가 눈 속에 덮였다. 오늘의 고비가 되는 가장 힘든 곳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느끼는 고통 그 자체를 어떤 환희로 승화시키는 일이 산행의 묘미이다. 거기에 수반되는 땀이 삶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악착같이 달라붙으니 설문대할망은 슬그머니 옷고름을 풀고 가슴으로 받아준다.

  백록담에 섰다. 자신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다.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힘이 불끈 난다. 인생의 힘든 여정 같은 오름에서 삶의 아픔까지도 밟고 오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오늘처럼 맑은 날은 처음이다. 저 멀리 수평선 끝에는 검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다. 눈을 가득 담고 있는 백록담은 예부터 심성이 어질고 효성이 극진한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도 나 같은 불효자에게 옷깃을 열어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병든 노모를 구해준 전설의 그 흰 사슴이 어디선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

  순연히 흰 빛을 토해내고 있는 동남 벽의 눈벌판과 북쪽 사면에 늘어서 있는 구상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 검은빛의 우람한 한라산 북벽의 날카로움이 하얀 구름과 어울려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고 그 너머 쪽빛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성산 일출봉이나 서귀포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제주시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정상에서 창공 너머 허공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젊은 날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바라본 마을 뒷산 징광산 능선 그 허공이다. 정상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저 허공을 넘어 새로운 길을 걷는 그 날의 감회가 새삼스럽게 기억이 난다.

  순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쏴 파도가 밀려오는 듯 신비한 소리가 들려온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발원하여 저 밑 계곡 숲과 설원을 지나 올라오는 듯하다. 그 태고의 시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드린다. 마치, 어린아이 같다. 아무런 계산도, 이해타산도 없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는 듯 보이는 장엄하고도 숭고한 백록담의 모습에 감읍할 따름이다.

  백록담에서 하산은 관음사 쪽 비탈길을 택했다. 이 관음사 코스를 타야만 한라산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한쪽이 모성이면 반듯이 또 다른 쪽은 부성이다. 그래서 한 쪽이 부드러우면 한쪽은 날카롭고 오르는 길이 완만하면 내리막길은 가파르기 마련이다. 어느 산이고 대부분 다 그러하다.

  한라산도 마찬가지다. , 북쪽은 부드러워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어도 남, 북벽은 검은 성벽이나 다름없는 급한 경사면이어서 고단함을 감내해야 한다. 지금 그 날카로운 바위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셈과 여림, 수직과 수평, 완만함과 급함을 대칭하고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제주에서 바라보면 백록담이 칼질을 당한 것처럼 깊게 골이 파여 있는 바로 그곳이다.

  내려오는 비탈길은 오를 때보다 더 힘겨웠다. 미끄러운 눈길, 한 걸음 한 걸음이 치열한 실존일 따름이다.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성적인 언어들은 하얀 눈 속에 소리 없이 묻히고 만다. 몇 년 전 태풍에 쓸려 흔적만 남은 추억의 용진각 대피소에서 웅장한 한라산 북벽을 올려다보고 험한 비탈길을 돌아서니 삼각봉이 거대한 창날처럼 하늘을 향해 웅장하게 서 있다. 관음사 쪽 등산길에서 가장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대피소에 들러 잠시 숨을 멈추고 간식으로 허기진 배를 때우니, 야성을 잃어버린 까마귀 두 마리가 먹이를 서로 먹기 위해 싸우고 있다. 칠월칠석에 견우와 직녀를 위해 제 몸을 잇대어 오작교를 놓아주기도 했다는 까마귀가 아닌가. 무엇이 고고한 새들을 저리 만들었을까.

  길가 열대림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허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 있다. 한때는 낙락장송이었던 나무가 험난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지금은 붉은 개미 등 수많은 곤충의 안식처가 되어 말없이 누워있다. 제 몸을 내어주고 떠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아닌가. 한 사람의 이승에서의 삶이란 윤회의 한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허무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퇴직 이후 무력감과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흙과 나무와 풀과 바위 그리고 그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바람과 물소리, 새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땀을 흠뻑 쏟고 나면 몸은 개운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니 더할 나위 없었다.

  한라산은 겨울에도 잠들지 않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양이나 빛깔이 화려하게 변신한다. 그중 겨울 순백의 세상, 그것은 티 없이 맑은 순수함이다.

  몸은 피곤하여 천길 벼랑 속으로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기분은 상쾌했다. 오를 때마다 산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다시 얻을 수 없는 순간인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작아지고 산은 더욱 크게 보인다. 세상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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