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섬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다. 바다와 바람과 산이 해와 달을 향해 열려 있는 곳 제주다. 언제부턴가 일상에서 부대끼고 버거울 때면 문득 가고 싶고, 거기에 가면 지친 심신이 기운을 얻는다.
지난 4월 초하루, 아내와 함께 한라산 남벽을 오르려고 영실 쪽을 택했다. 해발 1,280m 영실은 먼바다에서 오는 여명에 깨어나고 있었다. 숲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희붐한 빛에 거대한 산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아침햇살은 연둣빛 새잎을 더듬고 있었다.
영실, 붉은빛이 감도는 금강소나무 숲에 들어서자 솔향이 코끝을 스친다. 숲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하고 발음하면 흙 나무 냄새가 동시에 따라오고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이 숲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숲길을 벗어나자 가파른 돌계단이다. 눈바람이 휘날린다. 남벽 코스 중 가장 힘든 곳이지만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에는 오백 장군 등 수많은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있는 모습이 마치 달리는 준마의 갈기가 곧추서 있는 것 같다. 수직 바위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 둘려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놓칠세라 흰 구름이 몰려와 몸을 씻고 간다. 오를수록 눈보라가 거세진다. 한 시도 가늠할 수 없는 한라산 날씨지만 변덕이 너무 심한 것 같다.
서귀포는 봄꽃이 화사한데 한라산은 눈과 상고대가 봄과 겨울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아직 한겨울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보는 듯하다. 짙어가는 봄날에 산상의 신비한 설경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고 있는 듯 보인다.
구상나무 숲에 들어서니 눈보라가 더욱 세차게 불어온다. 아내는 꽁꽁 얼어붙은 울퉁불퉁한 험한 눈길을 잘도 따라온다. 평소 걷기를 싫어하는 그이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아서 백 년, 죽어 백 년을 산다는 죽은 구상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기후 상승에 따른 생태계 변화와 잦은 태풍에 나무들이 허리가 꺽인 채 죽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구상나무가 눈을 머리에 잔뜩 이고 하나같이 등을 구부리고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거세게 나무를 흔들어 못 참겠다는 듯 비명을 지른다. 저 둘은 만나면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없으면 못 견뎌 한다. 바람의 발자취는 늘 나무에서 발견되고, 나무의 음성은 바람에 의해 발견되니 둘은 천생연분이다. 바람 소리는 나무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흔들려라.”
살아있는 나무는 모두 흔들린다. 흔들려야 부러지지 않고, 흔들려야 뿌리째 뽑히지 않는다. 바람이 온순해지면 서로 오순도순 속삭이며 해 낙낙해지곤 한다. 누구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은 없다.
나는 사계의 한라산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겨울 산이 더욱 좋다. 구상나무 숲, 전혀 쓸쓸하지 않은 그 고즈넉함이 내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숲길을 지나자 선작지왓 설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5년 전 오월 초순 이곳에 들렸을 때 만개한 철쭉이 대평원을 붉게 물들인 비경은 가히 선경이었다. 유난히 색깔이 곱고 키가 작은 철쭉이 한라산 남벽과 조화를 이뤄 파란 하늘과 어울려 햇볕에 빛나는 광경은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다. 어느 시인이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 넘실거림에 묻혀 있으면 그만 미쳐버릴 것 같다’라고 노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평원이 온통 눈 속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다. 눈은 사람들에게 철저한 고독과 절대적인 사랑과 엄숙한 자기 성찰을 가르친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섬사람들은 영등할망이 오신다고 믿는다. 할망은 봄을 몰고 온다는데 이런 눈 세상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음력 2월 초하룻날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복덕개’라는 포구로 들어와서 먼저 한라산에 올라가 오백장군에게 문안을 드린 후 어승생 단골머리부터 시작하여 제주 곳곳을 돌며 동백꽃을 피우고, 세경 너른 땅에 씨앗을 뿌려준다는 전설의 신이다.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 방아오름이다. 주목 고사목에 핀 눈꽃 상고대가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남벽을 향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힘겹게 걷고 또 걸었다. 남벽이다. 언제 올라도, 쉽지 않은 한라산. 시계는 제로, 운해와 검은 구름에 덮인 채 적막하고 공허하다. 아득한 정적만이 흐른다. 저 구름 속에는 병든 노모를 구해준 전설의 흰 사슴이 뛰어놀고, 천사를 닮은 한라솜다리꽃이 만발해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조금 지친 듯 보이지만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젊어서부터 남편에게 지고 사는 것 같아도 늘 이기고 사는 여자, 안으로부터 우러나는 멋은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살아갈수록 서로를 친밀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오늘 산행이 흡족한 듯 웃고 있다. 바람이 조금 느긋해지자 눈이 펑펑 내린다. 하늘과 땅은 경계가 없고 시간은 멈춰있었다.
일순간, 짙푸른 남벽이 눈이 부신 햇살을 받으며 홀연히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설원에는 세찬 바람이 눈발을 흩날리면서 원을 그리고 있고 햇살이 구름을 선홍빛으로 물들인다. 바람과 구름이 한데 어울려 너울너울 춤을 춘다. 터진 구름 사이에서 햇볕이 아내의 얼굴로 쏟아져 내린다. 오늘 같은 날 남벽을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서운할까.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오지 않았는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하산 길이다. 병풍바위 전망대에서 고개를 들면 하얀 눈 세상, 고개를 숙이면 서귀포의 초록 세상이 아득히 펼쳐졌다. 산은 스스로 몸을 내어주는 것도 아니며, 길을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벅찬 감격이고 기쁨이다. 한 발 한 발이 바로 실존이다. 나의 인생길 역시 같은 맥락임을 깨닫는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가장 힘들 때가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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