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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그늘 깊은 생의 무늬

by 안규수 2021. 10. 11.

 

   그가 고향 농협 조합장으로 취임한 것은 서른여덟, 젊은 나이였다. 취임식장을 가득 메운 농민 조합원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고향을 지켜온 우리는 농심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농심이란 땅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며 열매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농심에는 거짓과 가식이 없습니다. 인류 문화의 바탕을 만드는 것이 농업이고 이 농업의 본질은 농심입니다. 농심은 인간과 땅 그리고 하늘이 하나가 되어 정성으로 생명을 다루는 일입니다. 농심은 자연과 통하는 마음이며 곧 하늘의 마음입니다. 이 농심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농심을 사랑합니다.”

   그의 농심 철학이 녹아든 취임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말이 없는 편이지만 고집이 세고 뚝심이 강해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책임감이 남달랐다.

  해방 이후 고향은 여순사건, 6.25 전쟁 등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과 질고로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줄곧 천대받는 것은 농민이었다. 그도 어린 시절 보릿고개 때면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우며 자랐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낙향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동시에 마을 청년들을 모아 새마음회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농촌계몽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열정만으로는 먹고 살기 바쁜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마을 생활환경 개선사업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 교실을 여는 등 꾸준히 뜻을 펼쳐 나갔다. 농심을 바탕으로 한 농민 본위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의 구현이었다.

  신출내기 직원 시절 그가 야간에 마을 좌담회나 농촌 현장을 방문할 때 그를 수행하면서 그와의 인연이 맺어졌다. 그는 현장 중심 농민운동을 펼치기 위해 밤낮없이 마을이나 들을 찾았다. 처음 그를 만난 농민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인사를 하면 그저 빙긋이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바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들판을 누비는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 그를 받아 드렸다.

  어느 날 밤마을 좌담회를 마치고 달빛이 교교한 들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낙향하게 된 심경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고교 시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어. 일제강점기에 브나로드(농민 속으로) 운동을 이끈 채영신을 좋아하네. 젊은 나이에 아깝게 일찍 가고 말았지만, 그의 농촌 사랑은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살아있어.”

  그 밤에 나는 세상은 경탄하고 감동하는 영혼만이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조합장 취임하고 처음 시작한 일은 고리채(高利債) 상환 운동이었다. 보릿고개에 빌린 쌀 한 가마에 한 말을 얹어 가을 추수기에 갚아야 했다. 고리의 사채를 얻어 쓰다 보면 결국 자꾸 빚이 불어나는 악순환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농협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고 몇 년 나누어 상환할 수 있도록 하여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잘사는 농촌이었다. 쌀농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처음 구상한 것이 참다래 작목 입식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묘목을 수입해 농가에 재배를 권장한 것이다. 어려움도 많았으나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 농민들의 고소득 작목으로 자리매김했다.

  모든 농산물은 유통과정에서 소비자가 값을 정한다. 그러나 전국에서 유일하게 생산자인 농민이 직접 값을 정해 출하하고 있는 곳이 그가 심고 가꾼 참다래 영농조합이다. 조합장실은 상담하러 온 농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 공이 인정되어 1986년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수여 받았다.

  5.18 광주 민주항 , 그는 밤이면 상부의 지시로 마을을 순회하면서 좌담회를 열었다. 당시 대대적으로 보도된 김대중 선생에 관한 날조된 신문 내용을 주민들에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좌담회가 끝나면 선술집에 앉아서 폭음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았다. 사실을 왜곡해서 농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다.

  6.29선언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으로 농협장도 임명제에서 선출제로 바뀌었다. 농민이 직접 선출하게 된 민선 1기 조합장 선거에서 그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 후 4년마다 치러지는 선거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었다.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5연승을 기록하니, 그의 나이도 어언 60줄에 들어섰다.

  그의 적은 다름 아닌 그 자신에게 있었다. 사람에게 욕망을 없애려는 것은 바다에서 파도를 없에는 것처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당선 횟수가 늘어나면서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조합장으로 변해갔다. 그의 순수한 열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정치에도 뜻을 둔 것이다. 그는 서울 출장이 잦았고 사무실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 때 나는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결국, 조합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관내에서 생산된 쌀을 출하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사기꾼들에게 걸려 엉터리 부동산을 담보로 거래하다 30억이 넘는 쌀값을 떼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여파는 매스컴을 통해 보도될 정도 심각했다. 세상일이란 묘한 것이어서 정치에 눈을 돌린 후 순간의 방심이 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사건에 관련된 직원들은 징계를 받아 면직되거나 타 사무소로 전출되고 조합장은 검찰에 고발되었다. 사고는 직원들의 잘못으로 생긴 일이지만 그들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그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사표를 내고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그가 20여 년 젊음을 바쳐 크게 성장한 조합은 그 사고의 여파로 경영이 악화, 침몰하고 말았다. 인근 조합에 흡수합병되었다. 공들여 세운 탑을 그 스스로 허물어버렸고 그 자신도 재산과 명예 등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 후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우중충한 하늘이 무거워 보이던 8월 초순, 그의 부음을 들었다. 아침 산책길에 나서다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9. 장례식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언제나 따뜻한 정으로 농민들을 대하든 그를 잊지 못한 사람들은 노령의 농민들이었다.

  그의 실패와 좌절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가 없다는 것, 한 번 빠져들면 다시 원상회복이 힘들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는 것. 시간은 고통과 상처를 포용하면서 우리 삶을 더 깊게 나아가게 이끈다. 고통과 실패와 좌절이 생의 무늬를 더 깊고 아름답게 새겨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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