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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귀뚜라미

by 안규수 2021. 10. 11.

 

   가을에는 가을의 소리가 있다.

  휘영청 달 밝은 밤 인근 풀숲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찌르르 찌르르 서럽게 울고 있다. 갈바람에 사각거리는 갈대 소리도 그렇지만 특히 귀뚜라미가 내는 묘한 선율은 가슴을 파고든다. 가을의 고적함에 애처로운 느낌까지 든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저리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는 곤충들은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처럼 삶이 길지 않다. 여름만 되면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는 평생 운다고 해도 길어야 한 달 정도다. 여름에 태어나는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역시 길어야 석 달 정도 산다. 귀뚜라미의 태생은 무려 3억 년 전이라고 하니, 짧게 살다 간다고 얕보지 말아야 한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앞 다리로 더듬어 가면서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험한 세상을 어찌 살까 걱정이 앞서지만,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가을밤 구성진 가락으로 심금을 울리는 귀뚜라미의 노래는 구슬프다. 수컷들이 며칠 동안 암컷을 향해 애절한 구애의 노래를 불러도 암컷은 애간장만 태운다. 귀뚜라미는 성대가 없다. 앞날개끼리 마찰을 일으켜 소리를 낸다. 날개를 자세히 보면 좌우 날개 아랫면에 좀 거친 부분이 있는데 이걸 바이올린 켜듯 비벼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성악이 아닌 연주인 샘이다.

  풀숲에서 암컷을 찾다가 안 되니 불이 켜진 내 서재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구하는 행동으로 소리만 내서는 어림없다. 상대에게 믿음직스럽게 보이도록 멋도 부려야 하고, 연주도 실력이 출중해야 한다. 저들 삶의 방식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최선을 다한다고 그만큼의 보답을 받는 게 아니다. 귀뚜라미는 최선을 다할수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멋진 연주가 포식자의 귀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 최선이란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거는 모험이다.

  귀뚜라미에게도 감정이 있다. 민감하기로는 메뚜기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에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인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하고 수줍음이 많아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더욱 애처롭게 운다. 그는 변온동물이라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날씨가 따뜻하면 체온을 쉽게 올릴 수 있어 크고 멋진 소리를 낼 수 있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소리를 내기가 힘들어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내보내지만 굳은 몸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겠는가? 날씨가 추워지면 노래는 사라진다. 그의 일생이 끝났다는 뜻이다. 시인이 죽으면 나비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귀뚜라미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이처럼 귀뚜라미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수행한 후 생을 마감한다.

  자연의 이치로 보면 귀뚜라미 3개월이나 내 인생 70년이나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지막 귀결은 같다. 귀뚜라미는 다른 곤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거미 등 상위 포식자에게 기꺼이 자기 몸을 내준다.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가 날벌레들의 생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다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날벌레들은 부지런히 날아다니지만 아무런 목적이나 방향도 없이 앞에서 날고 있는 날벌레의 뒤만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날아다니다가 7일 만에 굶어 죽는다는 것이다. 어찌 곤충인 날벌레만 그럴까?

  서재 열린 창문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불빛을 보고 찾아왔다. 혹시 조금 전 구슬프게 울어 내 심금을 울리던 그놈인가 싶어 유심히 살폈다. 날개를 펴고 옮겨 다니다가 멈추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가수처럼. 앞날개를 비비고 있는 모습에서 어떤 슬픈 노래가 금방 나올 것만 같다.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이 다한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일까. 방황을 끝내고 싶은 고독한 산책자일까. 해탈한 어느 고승이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것처럼 긴 앞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적하지만 조용한 실내와 달리 창밖은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머지않은 겨울을 예고하듯 적막감을 사정없이 깨뜨리고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불 꺼진 서재에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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