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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엄나무 가시

by 안규수 2021. 10. 12.

   이른 봄날 고향 산소에 들렸습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숲에는 나무마다 새잎을 피울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지요. 봄의 화신이 찾아온 것입니다. 떡갈나무와 밤나무는 봄바람에 가지를 흔들면서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고, 그 곁에 엄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습니다. 엄나무 가지에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납니다. 새싹은 쌉쌀하고 달콤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맛 때문에 사람은 물론이고 초식동물들조차 좋아합니다. 이렇다 보니 엄나무는 가지마다 자신의 여린 새잎을 지키려고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히 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엄마를 닮은 듯 보이는 나무입니다.

  이곳은 엄마가 생전 땀으로 일군 올망졸망한 밭이 천여 평이 있고, 지금은 부모님과 선대를 모신 선산이기도 하고, 엄마 삶의 터전이며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곳입니다. 감나무 과수원이 있어 한여름 내내 엄마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과 씨름하느라 구슬땀을 흘린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엄마 냄새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엄마는 스물둘 한창나이에 마흔이 넘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딸 둘에 외아들을 두었지요. 다시 외아들로 대를 이어 갈 일을 염려한 아버지는 큰엄마의 도움으로 청상(靑孀)인 엄마를 중매로 만났다고 합니다.

  엄마는 해방 이듬해인 유월 초하룻날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습니다. 두이레가 못되 엄마 젖이 말라 큰엄마는 분유가 없던 시절이라 어린 나를 업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였습니다. 그때 동네에 홍역이 돌아 어린 아기들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그나마 젖을 얻어 먹일 수 없었습니다. 배고파 우는 아기를 두고 볼 수 없었든 아버지는 손수 생쌀을 씹어 화롯불에 끓여 먹였다고 합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치아를 상해 말년에 위장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엄마의 가슴에는 아픈 멍울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아픔을 아들에게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엄마가 열일곱에 결혼했고, 남편이 일제에 징집당해 남양군도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큰엄마를 통해 어슴푸레 들은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더 낳기 소원했습니다. 음력 팔월 대보름날 밤이면 날 데리고 처낙골 곰 바위 밑에서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손을 머리에 얹고 쉼 없이 절을 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더 낳게 해주시라고, 그러면서 하나뿐인 아들의 무병장수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른 새벽 장독에 정화수를 올리고 쉼 없이 기도했습니다.

  나는 동네에서 개구쟁이로 이름을 날려 엄마 속을 무던히도 썩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니놈 보고 사는 이 에미는 어쩌라고 속을 썩이냐.” 하시면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 매의 따끔하고도 쓰디쓴 감각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논과 밭농사 일은 전적으로 엄마 몫이었습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종일 일하고 저녁 무렵에 돌아오시면 잠자리에서 온몸이 쑤시고 아프셔서 끙끙 앓으셨습니다. 내가 엄마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시원하다. 너 손이 약손이구나하시면서 잠이 드셨습니다엄마가 가끔 뒷골방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울고 계셨습니다. 철없는 아들은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광만 부리다가 먼 길 떠나신 뒤에야 엄마 가슴 속에 품고 살아 온 한() 무게를 가늠할 수 있으니 이런 불효가 어디 또 있을까요. 평생 소용돌이치는 여울목을 억척스레 건너온 엄마의 인생을 이제 망팔(望八)의 나이가 되니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1년 전쯤 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손주 종훈이와 함께 지냈습니다. 엄마는 큰손주를 무척 사랑하셔서 그때가 엄마 생애에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젊어서부터 몸을 아끼지 않는 탓에 속병이 깊어진 것입니다. 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다가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순다섯 되든 해 오월 한 많은 삶의 끈을 놓으셨습니다.

  삶을 통한 괴로움과 아픔의 극점을 넘어온 엄마는 우리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늘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실 줄도 알았습니다. 자신이 그런 고통을 몸소 겪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진정한 자신의 삶이 없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가난한 소녀 시절을 보내고, 첫 남편을 태평양전쟁에서 잃고, 아버지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삶을 견뎌낸 삶은 역경을 꿋꿋이 이겨낸 우리들 엄마의 그 본디의 바탕과 무던히 닮았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통해 아들 셋, 딸 하나를 낳고, 아들 손주 넷, 딸 손주 셋의 결실을 얻어 아버지의 평생소원을 이뤄주셨습니다. 못난 아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신 엄마는, 위대한 나의 엄마는 외롭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시린 울음은 난생처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속죄의 눈물이었습니다. 엄나무 가시처럼 억척스럽게 살다 가신 엄마, 생전에 무던히도 속만 썩인 못난 아들은 이제야 엄마를 애타게 불러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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