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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유년의 뜰

by 안규수 2021. 10. 12.

 

   고향의 초가삼간은 동향집이었다. 유월, 앞산 노강산에 해가 떠오르면 집은 조용히 햇살 속으로 침몰했다. 모내기가 시작되면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아버지는 일군들을 앞세우고 전장의 장군처럼 결연하게 어서 가자하시고 소를 몰고 앞장서서 들로 나가셨다. 동향집에서 아침 남향받이는 부엌뿐이다. 부엌 좌장인 엄마 손길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더욱 바빠진다. 일군들 새참에 점심 준비를 하시기 때문이다.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날씨가 쌀쌀할 때다. 동무들과 놀다가 어둑해질 무렵 집에 들어갔다. 안방에선 아버지가 재떨이에 담뱃대 터는 소리가 들렸다. 늦게 들어온 나는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아 부엌으로 들어가 숨었다. 부엌에서 나는 구수한 엄마의 냄새가 너무 좋았다. 엄마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편하고, 은근하고, 그렇게 따뜻한 곳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고샅에서 엄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고, 아니나 다를까 고놈에 자식, 밥도 주지 말어하시는 아버지의 역정 소리가 들려왔다.

  요즈음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린 시절 고향 산촌의 풍경을 기억 속에서 더듬고 아련한 추억에 잠길 때가 많다. 계절마다 독특한 정취가 있지만,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들면 고향 마을의 가을 풍경은 유난히 정겹고 아름다웠다. 저물녘이면 서쪽 하늘에 흡사 비단 천 보푸라기들만 따로 모아 펴 논 듯한 새털구름이 선홍빛으로 풍성한 들을 적시곤 했다.

  어린 시절 동갑인 재섭이, 성식이, 천식이는 유독 들놀이에 홀딱 빠진 동무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방에 집어 던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산으로 들로, 냇가로 바람난 누렁이처럼 싸 돌아다녔다. 그렇듯 유년은 자연의 품 안에서 놀고 자랐다. 자연은 곧 학교였고 선생님이었다. 자연의 일원으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가르쳐 주었다.

  정이월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삼월이면 보릿고개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되면 얼었던 시냇물이 녹아내린다. 야산에서 맨 먼저 먹는 꽃이 참꽃이었다. 한 줌씩 꽃을 따서 한입에 넣고 씹으면 달짝한 맛이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또 냇가 버들강아지를 따 먹고 호루라기를 만들어 불기도 했다. 찔레 순이 돋으면 꺾어 먹고 찔레꽃과 삐삐도 먹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은 송기였다. (이때 우리는 송구라고 불렀다). 날것으로 먹는 송기는 어린 소나무의 새순으로 올라온 가지다. 낫으로 껍질을 벗기면 속살이 보이고 그걸 벗겨내 한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솔 내음이 향기롭고 달았다.

  시냇가에는 박하풀이 무성하고 미나리아재비와 여뀌 풀과 도깨비 마늘 등 수많은 풀이 자란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맨발로 자갈밭 길, 모래밭 길을 걷는 그 감촉은 어디 비할 데가 없었다. 여름철 개울에서 미역을 감으면 피리 떼들이 몰려들어 작은 주둥이로 배꼽을 간질이고 불알을 꼬집기도 했다. 마을을 안고 고불고불 돌아 흐르던 개울과 문전옥답은 30여 년 전 이곳에 저수지를 막는 바람에 사라지고 없다. 그저 마음속에 한 폭의 산수화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보릿고개에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산과 들을 뛰고 달릴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렇게 산과 들에서 오염되지 않은 먹거리가 풍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결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에다 처자식 거느리고 들에 나가 흙을 만지면서 농사짓는 소박한 삶이었다. 여름 내내 아버지는 일군과 퇴비 만들 풀을 하루에 두 짐씩 해 날랐다. 비료가 없던 시절이라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가축의 분뇨나 짚, 잡초, 낙엽 등을 발효시킨 퇴비가 필요했다. 퇴비 더미를 보면 그 집의 농사 규모를 짐작할 수 있고, 그런 퇴비를 사용한 기름진 흙 덕분에 병해충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오줌 한 방울이 소중했던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지동 아재는 알뜰한 것이 지나쳐 염치없는 사람으로 아버지의 빈축을 샀다. 긴 겨울밤 우리 집 사랑방에서 밤참을 대접받고는 오줌이 마려우면 슬그머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 꼬박꼬박 자기네 오줌단지에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엄마는 벼 이삭이 노랗게 물들면 집 앞 논이랑을 치면서 미꾸라지를 잡아 방아 잎과 산초가루를 넣어 추어탕을 끓이셨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나는 그 엄마 손맛이 그리워 추어탕 전문집을 기웃거리지만, 아직 그 맛을 찾지 못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풍세(風勢) 사나운 날, 엄마가 오일장에 다녀오시면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참꼬막국 밥상이 차려졌다. 우수수 울타리를 할퀴고 가는 매운바람 소리와 달리 방안은 화롯불의 온기로 그지없이 안락했다. 그날 밥상머리의 조건은 진수성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식구 중 아무도 그 추위 속에 나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버지 마음에 드신 것이다.

  “참 좋다.”

  아버지는 그렇게도 좋으신지 한숨처럼 말씀하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유명한 꼬막 주산지가 내 고향 벌교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식감이 단단하고 쫄깃하면서 은은히 풍기는 바다향이 일품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꼬막 속살을 외서 댁에 비유하는 장면의 묘사가 너무 강렬해 벌교 꼬막이 그만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말았다. 그 덕에 읍내 거리에는 꼬막 정식이란 식당 간판이 즐비하고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먹고살기 힘든 바닷가 마을이 꼬막 덕을 독특히 보고 있다. 그러나 참꼬막은 수년 전부터 갯벌의 오염으로 생산량이 턱없이 줄어 맛보기 힘들어졌다. 그 대신 양식 새꼬막이 생산되고 있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설날, 동내에서 제일 고령이신 평촌 어른댁을 찾아뵈었다. 아흔을 넘긴 어른은 왔는가.” 하시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참으로 어렵게 살았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단 말이시, 그래도 그때가 사람답게 살았제라고 하시면서 만고풍상의 흔적이 베인 주름진 얼굴로 웃고 계셨다. 배는 고파도 사람답게 살았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지나온 삶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유년의 뜰은 시간이 만든 현상이 아닌가. 실로 시간의 힘은 무섭다. 시간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시간의 구조물이면서 또한 시간의 잔해처럼 느껴진다. 갈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일들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 시간이 준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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