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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영원한 모상 母像

by 안규수 2021. 10. 12.

 

   아버지는 손이 귀한 집안의 4대 독자로 태어나셨다. 그 시절에는 가게의 대통을 잇는 일처럼 큰일은 없었다. 아버지 나이 마흔을 넘겨서도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둬 5대째 독자로 대를 잇게 되어 가정에 시름이 깊어졌다. 스물둘 엄마는 해방되던 해 청상과부로 아버지를 만났다.

  그 이듬해 음력 유월 초하룻날, 보리 까실이 한창일 때 아버지는 그리도 소원하던 아들을 얻었다. 큰엄마가 아기를 직접 받았다고 한다. 그때는 대문에 금줄을 쳐서 이웃에게 아이가 태어났음을 알리고 불결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아들이면 금줄에 빨간 고추를 매달았다.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금줄은 대문이 아니라 산모와 아이가 있는 작은방 문창살 위에 쳐졌다.

  내가 태어난 지 두 이레가 막 지날 무렵 엄마 젖이 거짓말처럼 말라버렸다. 그 시절에는 아기 분유가 없을 때라 큰엄마는 배고파 우는 날 안고 동네 산모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이고 밤이 되면 생쌀을 갈아 화롯불에 끓여 먹였다. 그래도 아이의 배고픔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해 설상가상으로 동네에 홍역이 퍼져 어린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동냥젖마저 얻어 먹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쌀죽으로 근근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큰엄마는 밤마다 입으로 쌀을 씹어 죽을 끓여 배고파 칭얼대는 아이 배를 채워주었다.

  큰엄마는 몇 개월이 지난 후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비쩍 마른 아이가 옹알이한 것을 보고 살렸다는 기쁨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엄마 젖을 얻어먹고 근근이 명을 이어온 아이가 밥을 먹으면서 생기를 찾았다. 그때는 손 귀한 아들이 태어나면 자식 많은 집에 양아들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인근 마을에 사시는 수양아버지는 사주를 풀어보고 오행에 수() 즉 물이 부족하여, 항렬 규()자에 수()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서 안방 가시네네 하신 게 놀림이 발단되었다. 온 교실이 빵 터지고 그때부터 친구들은 날 보고 가시내라고 불렀다. 결국 초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가시내였다. 그건 여자 어린아이를 홀대해서 부르는 말이다. 멀쩡한 사내를 그렇게 부르니 내 이름이 죽고 싶도록 싫었다. 친구들과 코피 터지도록 싸움도 많이 했다. 그때 받은 이름에 대한 트라우마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큰엄마는 겨울밤이면 화롯불에 고구마를 얹어놓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 등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찌나 입담 지게 이야기를 잘하시는지 눈물 콧물 흘리면서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 큰엄마가 재 너머 산에 들국화를 캐러 가신다기에 따라나섰다. 가을의 징광산에는 구절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큰엄마는 구절초를 뿌리째 캐고 나는 보따리를 들고 뒤따라 산속을 헤맸다.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의 약재로 쓸 것이었다. 저물녘 큰엄마는 들국화를 주섬주섬 챙겨 보따리에 이고 나는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등에 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산 능선 잿몬당 소나무 아래 치마바위에 보따리를 내려놓으셨다.

  “, 여그서 좀 쉬어야 쓰것다.”

  큰엄마의 눈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이 열일곱 묵어서 니아부지헌테 시집이라고 왔는디.”

  이렇게 시작된 큰엄마의 이야기는 꽤 길게 이어졌다. 주로 당신의 어려운 시집살이며 살림을 알뜰히 일군 얘기들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큰 한숨을 쉬었다.

  “니작은 누나는 서방 잃어뿔고 미친 거맹키로 어딜 그리 싸돌아댕긴지 불댕이었제, 워디간지 찾다보면 늘 여그 와 있었다.”

  작은 매형이 반란군의 죽창으로 처형된 곳이 바로 이 소나무 아래였다. 사위 잃고 자식마저 가슴에 묻은 엄마는 서러움이 복받쳐 눈시울이 붉어졌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큰엄마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고 산골짜기에 흐드러지게 핀 연한 보랏빛 들국화는 잔잔한 가을바람에 너울거렸다.

  “니아부지랑 작은누나랑 요 산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 느그 매형 시신을 찾으러 댕겼다. 징헌 넘의 시상 그 난리 속이 엊그지같은디, 지옥이 따로 없어야, 워째 고런 일이 다 있을까 잉. 아이고, 애미 팔자가 사납어서 그런다.”

  큰엄마는 늘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가냘픈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큰엄마의 마음을 모른 척하면서 겉돌기만 했다. 아버지는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작은 집에 가기 위해 슬그머니 대문을 나섰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큰엄마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밤마다 홀로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술이 떨어지면 주전자를 들고 주막으로 튀는 건 나였다. 큰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병석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울먹이셨다.

  “배고픈 시절에 애미 젖 떨어지고, 사람 되기 힘들 거라 생각혔는디. 살아줘서 고맙다. 쯧쯧, 넌 명줄이 길 거여. 니엄마 한테 잘해라.”

  당신이 먼 길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울컥 설움이 솟구쳐 나도 모르게 큰엄마를 얼싸안고 흐느꼈다.

  “엄마!”

  날 낳아준 엄마보다 더 살뜰한 정을 주신 큰엄마다. 배고파 우는 날 안고 골목을 헤매던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분에게 한 번도 효도다운 효도를 해본 적이 없으니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어려서 엄마에게 가면 큰엄마에게서 멀어졌고 큰엄마에게 가면 엄마에게서 멀어졌다. 두 여인 사이엔 아버지보다도 내가 있었다. 내가 둘을 잇는 끈이면서 동시에 둘 사이의 벽이었다. 그것이 나의 남다른 정체다. 이러한 남과 다른 나의 정체에 눈을 뜨게 한 이는 언제나 큰엄마였다. 가족 묘소에 두 분 어머니가 누워 계신다. 큰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엄마는 그 곁에 홀로 누워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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