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쩌란 말이냐. 나는 어쩌란 말이냐. 의사는 나더러 집에 가란다.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것 원 없이 먹고 요양하란다. 요 며칠째 명치가 아프고 하혈을 계속했다. 항암치료도 이제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온 장기에 손을 쓸 수 없도록 암이 퍼져 있어 이제 더는 손을 쓸 수 없단다.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단 말이냐. 내가 왜? 의사의 싸늘한 말 한마디가 내 생의 갈림길이 되다니, 어이가 없다. <1980. 9. 25>
형,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밖에 없는 형이 남긴 처절한 절규가 담긴 마지막 일기이다. 암으로 위를 거의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받은 지 9개월쯤 되는 어느 날 병원을 방문해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조용히 형수를 불렀다. 길게 한숨을 내쉰 의사 선생님이 형이 길면 3개월, 짧으면 한 달 정도 살 것이라고 말했다. 형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이 사형을 선고받고 형 집행 날짜까지 통보받은 것이다. 차마 그 말을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형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갑시다.”
이 짧은 한마디를 들은 형은 멍한 모습으로 형수를 바라보았다. 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빛이 차단된 암흑 같은 병원을 형은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형의 시계는 그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집에 오는 내내 형은 말없이 무거운 침묵 지키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할 것 같은 울음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내었다. 온 집안이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날부터 형은 오후가 되면 저수지 둑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짧은 인생 여정을 뒤돌아보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면서 체념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광경을 동네 사람들도 멀리서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뿐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윗동네에 사는 형의 단짝 친구 옥수형만 형을 붙들고 울다 갔다.
흰 구름이 징광산 높은 재를 넘기 힘들어 파란 하늘 끝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을은 이미 나뭇잎 끝에 매달려 있다. 형은 저수지 둑에 앉아 그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산그늘이 길게 만들어졌다. 마흔한 살, 덧없는 인생이 깊은 시간이 개울물 흘러내리듯이 그렇게 하릴없이 흘러왔을 뿐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며칠째 오후 한나절을 저렇게 앉아 나무와 바람, 저수지 물결 등 허무가 빚어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한 인간이 이생에서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절한 광경이었다.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자 하늘의 별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형, 집에 가자?”
“응, 왔냐.”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너한테 마지막 부탁이 있다. 불쌍한 어머니 부탁한다. 나 같은 불효자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못 한 효도 대신해 드려야 한다.”
마지막 가는 길, 아내도 어린 자식들이 아니고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형도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나를 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얼마를 울다 보니 저만치서 마중 나온 어머니가 멍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날 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그 시간이 이생에서 형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은 아들 귀한 집 5대 독자로 태어났다. 딸만 내리 셋을 두고 고심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손자를 보시는 것이 소원이셨다. 혼사 일이 정해지자 형은 이 나이에 장가는 무슨 장가냐고 울고불고하더니만 학교에 가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신랑이 잠적해 버린 것이다. 식구들이 읍내를 뒤지고 수소문 끝에 기차 굴 앞 친구 집에서 간신히 형을 찾아내 혼사를 치를 수 있었다. 장가드는 날 가마 타고 신부댁으로 향하는 철부지 어린 신랑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장가가기 싫어서 잔뜩 부어 있는 형과 달리 나는 형 가마 옆에 바짝 붙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갔다. 그때 형 나이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웃 마을 세 살 위 처녀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형은 아버지 소원대로 아들 둘에 딸 넷 육 남매를 두었다. 큰아들은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했고, 큰딸은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
형의 마지막 가는 길은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절한 형극의 길이었다. 한시도 쉼 없이 찾아오는 통증은 온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누었다 앉았다 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남편을 어린애처럼 업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는 형수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가는 길이 이리도 힘들어서야 어떻게 간단 말인가? 성경에서 욥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위암 말기에 겪어야 하는 극심한 통증은 지금까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소슬바람이 분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프다. 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 소리에 달빛이 서럽게 흐르는 밤, 형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갔다. 상여가 나가던 날 형이 근무하던 직장 직원들의 상엿소리에 하늘도 울고 땅도 슬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