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폭력 미투’ 사건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어릴 때 학교폭력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나도 가슴 한쪽에 생각조차 하기 싫은 트라우마가 있다. 몇 해 전 중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친구들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TV에서 보고 그날의 악몽이 남긴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밤잠을 설쳤다.
내 나이 열다섯, 중학교 2학년 때였다. 6월 초여름 햇볕이 무척 따가운 날이었다. 2교시가 끝나고 학교 뒷산인 제석산에 올라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4교시 수업을 받고 있을 것이니 벌써 2시간째 수업을 빼먹고 있다. 이 산 고개만 넘으면 선암사로 가는 길이다. 처음 생각은 선암사까지 가려고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섬에 홀로 남겨진 듯 불안·초조감에 지쳐 있을 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산 아래 교실에서 아이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친구들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K의 목소리였다. 읍내 병원장 아들인 K는 땅딸막하면서 다부지고 고집스러운 인상으로 매우 저돌적이고 거칠었다. 그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교실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움찔했다. 잠깐 망설이다 숲에서 나와 그 앞에 섰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며 괜찮으냐고 묻고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는 뒷일이 두려웠는지 선생님에게 말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그날 방과 후 담임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어디 갔냐고 물어 뒷산에 올라갔고, 중간고사를 망쳐 그랬노라고 어물쩍 대답했다. K가 두려워서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선생님의 훈계를 듣고 교무실을 나왔다. 선생님이 그날 일어난 일을 급우들로부터 소상히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날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선생님은 은근히 K를 통해 반의 질서를 잡고 통제하고 있어서 K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 학기 초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가는데 k가 아무런 이유 없이 화장실 뒤편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나더러 건방지다면서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나는 반항했고 끝내 뒤엉켜 싸웠지만, 힘이 달려 실컷 얻어맞았다. 그 당시 교실에서는 읍내 아이들이 시골 아이들을 촌놈이라고 깔보고 무시했다. 읍내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아 시골 아이들을 괴롭혔다. 그 일 이후 K의 괴롭힘은 더욱 강도가 심해 갔다. 공부는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한마디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K의 위세에 눌러 친구들도 나를 피할 뿐 도와주지 않았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교실에서 아무도 곁에 오지 않았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집단따돌림을 당한 것이다. 결석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무력과 모멸감, 수치심에 몸과 마음이 수척해 갔다. 무엇보다도 무너진 자존감과 무기력으로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날도 방과 후 학교 뒤 제석산 밑 공터에서 동급생 네 명의 k 졸개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했다. 이유는 군기가 빠졌다고. 학교에서 십리 길을 걸어서 집에 밤늦게 도착했다.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두고 그길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윗동네로 가는 산길로 인적이 드문 곳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짙은 어두움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싫었다. 무서움에 등골이 오싹해도 참고 어둠 속을 무작정 걸었다. 풀벌레 울음소리만 요란할 뿐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숨이 막혔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은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등불을 들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워매, 내 새끼야, 무신일이여! 잉, 왜 그러냐?”
엄마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허다, 엄마가 못나서 그런다. 불쌍한 내 새끼” 하시면서 서럽게 울었다. 엄마의 서러운 눈물이 거센 물결처럼 내 심장을 출렁이게 했다. 나 하나 바라보고 힘든 삶을 살아오신 엄마. 그 엄마의 눈물은 내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눈 녹듯 사라졌다.
다음 날 학교에서 K는 교실에서 두 눈을 무릎 뜨고 날 괴롭혔다. 그는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밥 먹은 게 소화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야! 나 좀 그만 괴롭혀라. 이 더러운 새끼야.”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맞아 죽을 각오로 그에게 대들었다. 그의 졸개들과 함께 날 에워싸고 날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엎어지고 깨지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 일은 교내에서 소문이 나서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둘 다 교무실로 불려가 종일 무릎을 꿇고 있다가 종례 시간이 되어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나는 일방적 피해자인데 똑같이 취급하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일주일 동안 매일 반성문을 써서 교무실에 제출하고 훈방 조처되었다. 그 일 후 다른 반으로 옮기고 나서 K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에 거주하는 중학교 동창 10여 명이 지리산 자락 구례 산동 온천으로 봄나들이를 온다는 연락을 조카 효숙이로부터 받았다. 효숙이는 사촌 누나 딸로 동급생이었다. 그날 약속 시간에 맞춰 지리산호텔 로비 커피숍으로 갔다. 로비에서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녀들이 날 반겼다. 그들과는 실로 반세기만의 만남이었다. 모두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고 잘 나가던 학생들이었다. 시간 속에 멈추어 있던 앳된 소년·소녀의 흔적을 세월이 모두 지우고 없었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어찌 저리 똑같을 수 있을까, 내 눈을 의심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인심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그들 가운데 내 모습이 보였다. 나도 저들처럼 늙었다는 말인가.
그들 가운데 K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몸이 수척해 보였다. 지난해 K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효숙이가 귀띔해 줬다. 밤이 이슥해지자 모두 방안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당연히 학창 시절 이야기였다. 효숙이가 K를 보며 입을 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삼촌과 교내에서 심하게 싸운 적이 있는데 기억해?”
K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 되물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정작 그가 사과하니 받아 드리고 악수를 했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어도 그날 밤 어두운 산길은 잊히지 않는다. 그때 서럽게 흐느끼던 엄마의 눈물이 아직도 내 가슴에 마르지 않고 남아 있어서다. 당신이 못나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엄마, 나 또한 못난 아들이어서 얼마나 미안했던가. 지난해 시월 K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먼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