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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그리운 들꽃 향기

by 안규수 2021. 11. 6.

     <책 머리에>

 

     그리운 들꽃 향기

 

   이런저런 글들을 모아봤다. 잡다하고 궁색해서 무안했던 글들이다. 구슬이라면 꿰어야겠지만 사금파리를 엮어서 무엇 하나 싶은 회한이 수시로 들었다.

  때로는 유속流速에 안절부절 떠내려간 시간이었다. 흐름도 깊이도 알지 못한 시간이었다. 마을 앞 개울은 오래전 출렁이던 내 고통의 물결을 흔적도 없이 지운 채 말간 얼굴로 다가왔다. 내 글의 근원이 거기 있음을 알았다. 쓰르라미 소리가 떨리는 밤, 가로등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밤 조용히, 먼 시간의 회랑을 돌고 돌아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긴 겨울밤, 매운바람 소리와 달리 방안은 화롯불의 온기로 그지없이 따뜻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큰엄마는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은 고달픈 인생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들은 뼈아픈 가족사이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아픔이고 통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이라는 근대사의 격랑 한가운데에서 한 가족을 감당해야 했던 아버지의 삶은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위와 딸을 잃고 남은 가족을 지키고 당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은 오직 침묵과 체념뿐이었다.

  사상思想, 좌우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올가미에 덧씌워져 죽이고 죽어야 했으니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걸 따져볼 길조차 없는 무력한 농민들의 절망과 분노, 공포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까. 내 엄마의 슬픈 이야기,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서슴없이 풀어 놓는 이유가 있다. 엄마 역시 격동하던 그 시대의 희생양이었고, 심연에 숨겨진 아픈 응어리를 삭이고, 정서적 위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어서부터 산을 좋아했다. 무슨 고지전을 치르는 듯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 어머니 품속 같은 산의 매혹에 빠져들었고, 나무 풀 들꽃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풀꽃이 먼지 낀 나의 눈꺼풀을 열어 주었다. 그 풀과 들꽃을 삶을 기웃거리다 보니, 어찌 보면 지혜가 담겨 있고, 초록은 동색이듯 힘없는 우리 민초들의 꿋꿋한 기상을 무던히 닮은 듯 보여 오늘도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닌다.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자의적 선택이라기보다 어떤 소명 의식 같은 것이었다. 이 책은 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인 만큼 매우 주관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었다. 글들의 다양한 맥락들을 객관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의 주관적인 눈에 객관적인 필터를 겹쳐 그것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하였지만,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나는 이제 동굴을 탐사하듯 나의 내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려 한다. 숱하게 입구에서 돌아 나왔던 동굴이다. 이른 사람이 있으면 늦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초조해하지 않으려 한다. 굳이 책을 묶는 것은 이전의 나와 결별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도처에 스승이 있었던 내 인생에 감사하고, 저승의 사랑방에 누워 계실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친다. 내 안으로 들어갈 길에서 가장 진지하게 만날 분은 어차피 아버지시다. 부모의 삶이 곧 내 이야기의 바탕이란 것을 얼마 전부터 나는 명료하게 깨닫고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잊지 못할 분들이 많다. 지금까지 내 글에 대하여 많은 애정을 가지고 조언해 주시고 지도해 주신 분들에게 앞으로 더 나은 글로 보답할 예정이다.

 

                                                 2021년 깊어가는 가을밤에

                                                                        안 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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