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특징 중 하나는 실존의 기록이다. 수필에서는 대개 작가가 주인공이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관혼상제가 수필 속에 있다. 많은 수필가들의 첫 수필집은 그래서 이런 생애의 기록, 그러니까 자전적 논픽션에 가깝다. 따라서 수필가의 첫 번째 수필집을 바라볼 때 작가의 생애 전반을 염두에 두게 된다. 이번 글은 한 사람의 생애를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첫 번째 해석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최고의 유일한 가치는 부모와 자식을 잇는 징검다리라는 것, 그러니까 혈족 번식이라는 것이다. 한 혈족을 구성하는 모든 개별적 생애는 예외 없이 징검다리이다. 한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식을 낳고 제대로 길러 그 자식이 잘되면 성공한 인생으로 본다. 인류 전체나 하나의 민족을 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 한 집안의 시조나 중시조로부터 시작해 핏줄이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본다면 한 생애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해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생의 나의 삶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회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현실에서 한 생애는 그 생애로써 끝이 날 뿐 그 영혼이 훗날 다른 몸에 의탁해 다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대를 잇는 중요함보다 현생의 나의 삶이 행복해야 한다. 어느 삶이 더 의미 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글에서는 대를 잇는 것보다는 한 인간의 생애가 행복해야 한다는 데 좀 더 방점을 찍고 싶다. 1. 안규수의 수필집 《무진으로 가는 길》(소소담담, 2021년12월)은 출발은 행복하지 않았으나 스스로의 노력에 힘입어 행복을 얻어가는, 그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집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수필집은 1부 ‘기억이 흐르는 강’을 시작으로 2부는 ‘유년의 뜰’, 3부는 ‘눈 내리는 날’, 4부는 ‘선암사처럼 늙어라’, 마지막 5부는 ‘정글은 말이 없다’로 꾸며졌다. “20세기 후반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수필가 안규수는 전남 보성 출생으로 벌교중학교와 벌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무원으로 근무했고 농협으로 직장을 옮겨 “평생 농민을 위해 일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싹은 중학생 때 접한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읽으면서 자라기 시작했고 《톨스토이 단편선》 또한 문학적 감수성에 자극을 주게 된다. 퇴직 후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에서 4년 간 수강한 그는 2010년, 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수필로 등단해 에세이스트 이사와 전라지회장을 역임하면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무진으로 가는 길〉은 표제작임에도 4부에 배치되었다. 작가의 의도인지 출판사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작가의 길을 먼저 읽고 난 후에 무진으로 가는 작가의 심정이 옳게 드러날 수 있겠기에 그리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반대로, 표제작을 읽은 후에라야 작가의 삶을 옳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글에서는 표제작부터 살펴볼까 한다. 작가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다가 갑자기 안개 자욱한 방죽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껴 집을 나선다. 동천 풍덕교부터 순천만 갈대밭 방죽까지 걸을 작정이었다. “동천은 순천시 서면 청소리 송지봉에서 발원하여 순천만으로 흐르는 칠십 리 물길이다.” 그 길 따라 그가 걷는 시간은 지금까지 걸어온 안규수 작가의 길이기도 하다. “물은 조용히 흐르면서도 때로는 광란으로 변하기도 한다.” 인생도 그렇다. 작가는 순천만 정원을 걸으며 풍경을 눈에 담지만 그가 걷는 길은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은 마음의 삶이라 했다던가, 동천은 도란도란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다. 정원을 휘돌아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능수버들가지를 붙들고 한들거리며 춤을 추던 바람도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천변을 서성이던 백로 두 마리가 날개를 펼쳐 허공을 가른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안규수의 〈무진으로 가는 길〉은 한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 고독한 사내의 이야기일 수 있다. 안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개는 혼돈과 비밀, 신비스러움을 상징하지만 보통의 경우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리 비유하기도 한다. 다음의 문장으로 그의 심리가 짐작된다. “무진의 명산물인 그 안개도 가뭇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늦가을 석양빛을 등지고 서서 표표히 흔들리는 갈대꽃의 담백한 광휘光輝를 보면 여한 없는 생애의 마지막 빛남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안개 속을 벗어난 작가의 현실을 대변한 것이다. “나는 자유도 행복도 갈구하지 않고 비움의 삶을 살기로 한다. 어느덧 억압에서 벗어난 나는, 이 순간이 족하다.” 이 문장은 책 표지에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민들레처럼 살고 싶다”고 적은 카피와도 일맥이 상통한다. 출생부터가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안규수는 선친 세대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며 여순사건과 6.25동란, 월남전 파병 등의 국가적 사건을 감수했다. 이렇듯 《무진으로 가는 길》은 작가의 삶의 여정과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여기저기에 편린들로 등장한다. 2. 수필집을 평하면서 문학 이론을 들이대는 것은 언제나처럼, 참으로 어색하다. 삶에 무슨 이론이 있겠나 싶어서이다. 더욱이 일흔 다섯 해의 삶, 거기에 선대의 삶까지 더한다면 백 년이 넘는 삶이 된다. 그 삶의 기록이 이 책일진대, 그것을 원고지 몇 십 장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과 작가의 가족 구성원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할까 한다.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세 가지 일을 들 수 있다. 첫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출생, 둘째는 여순사건으로 잃은 작은 매형과 작은누나, 셋째는 아버지의 죽음이다. 첫 번째 사연에 대해서는 행불행을 말하기 어렵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연은 매우 슬픈 일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사연이 작가의 인생을 점지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다. 세 가지 일 모두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들로, 삶이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런 불리한 조건을 감내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갔다. 작가는 1946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원래 열일곱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일제에 의해 징집당해 남양군도에서 전사함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4대 독자였는데 작가의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1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던 암흑의 시대, 작가가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본부인은 외아들만으로는 대가 끊어질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면서 남편에게 다른 여인을 소개했고 소실로 들이게 된다. 그것은 큰어머니의 뜻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가계의 대통을 잇는 일처럼 큰일은 없었다”며 작가는 “아버지 나이 마흔을 넘겨서도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둬 5대째 독자로 대를 잇게 되어 가정에 시름이 깊어졌다”라고 적었다. 이 시름은 어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가정의 몫이 된다. 작가의 어머니는 스물둘 한창 나이에 마흔이 넘은 아버지를 만났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소실로 들였고 그 사이에서 작가를 낳았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 살이었고 큰어머니 역시 50대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태어나서 큰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늘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가냘픈 여인”이었던 큰어머니의 마음을 아버지는 모른 척 겉돌았고 젊은 몸이 좋았는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작은 집에 가기 위해 슬그머니 대문을 나섰다.” 작가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큰엄마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밤마다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술이 떨어지면 주전자를 들고 주막으로 뛰는 건 나였다.” 친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고 큰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어려서 엄마에게 가면 큰엄마에게서 멀어졌고 큰엄마에게 가면 엄마에게서 멀어졌다. 두 여인 사이엔 아버지보다도 내가 있었다. 내가 둘을 잇는 끈이면서 동시에 둘 사이의 벽이었다. 그것이 나의 남다른 정체다. 이러한 남과 다른 나의 정체에 눈을 뜨게 한 이는 언제나 큰엄마였다.”(〈큰엄마〉) 그래도 큰어머니는 마음이 넓은 여인이다. 작가가 태어날 때 직접 받았으며 태어난 지 두 이레가 막 지날 무렵 엄마젖이 거짓말처럼 말라버리자 어린 핏덩이를 안고 산모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동냥젖을 얻어 먹였다. 설상가상 동네에 홍역이 돌아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동냥젖마저 얻어 먹일 수 없게 되자 쌀죽을 끓여 아기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뒤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비쩍 마른 아이가 옹알이하는 것을 보고 살렸다는 기쁨에 (큰어머니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장면들은 중세적 문화의 한국 가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의 아버지는 유기장이었다. 서양에서 태어났으면 사회적 존중을 받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공업 종사자, 그러니까 상인 바로 위 계층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장자는 가계의 대통을 이어야 한다. 대통을 이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아들 하나로 부족하니 가정에 시름이 깊어졌고, 장자가 소실을 들여 아들을 하나 더 얻었으니 집안에 행복의 기운이 돌았을 테고, 작가는 그런 환경에서 소중한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기운은 작가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다친 몸을 치료하지 못해 운명하게 되었을 때 작가의 손을 잡고 한 말에서도 느껴진다. 열여섯 막내아들을 두고 가는 것이 못내 걱정인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으로 말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어린 널 두고 가기가 힘들구나.’ 작가의 출생은 유기장 아버지에게 노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 같다. 피카소를 예로 들자면, 그는 약 17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가 생애에 걸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의 인생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7명의 여인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여인들과의 사랑이 충만할 때 샘이 솟듯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산출과 사랑의 궁합이라고 부를 만한데 대통을 이을 아들이 한 명 더 생겼다는 안도감이 아버지에게 기운을 불어넣었고 가족에게는 행복을 선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작가의 집안에 행복한 일만 있지는 않았다. 그의 가족도 여순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에 일어났다. 작가의 나이 만 두 살 하고 넉 달이 지났을 때였다. 여수에 주둔했던 14연대 소속 좌익 계열 군인들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나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등이 터진 이들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들은 정부군을 따른 ‘죄’로 반란군에게 학살당했으며, 반란군을 따른 ‘죄’로 정부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지주는 아니어도 괜찮은 살림에 머슴까지 둔 마을 유지”였기에 인민재판에 끌려가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다행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작가의 작은매형 덕분이었다. “매형이 반군에 합류할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를 살려낸 것이다.” 그러나 작은 매형은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았고, 이듬해 봄 이웃의 밀고로 반란군들에게 붙들려가 그들에 의해 죽창으로 살해당했다.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죄목도 없이 죽었다. 작은누나는 남편의 시신을 찾은 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 “삼 년을 그렇게 앓던 누나는 스물넷 젊은 나이에 두 살배기 딸을 남기고 기어이 남편 곁으로 갔다.”(〈손가락 총〉) 작가는 묻는다. “죄란 무엇이었을까? 무자비한 총과 폭력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이 죄였을까.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장인을 살리고 사위가 죽었고, 그 남편을 따라 딸이 죽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놈(남) 탓할 것 없어. 모두 다 내 탓이제.” 늦둥이 아들을 얻은 기쁨과 달리 아버지는 사돈의 소중한 아들을 잃게 한 셈이다. 그러니 매우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큰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사위를 잃고 자식은 가슴에 묻은, “늘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산 가냘픈 여인”이었다. 이런 참담한 지경을 당하면 사람들의 기억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끝까지 기억하며 저항하는 쪽이다. 둘째는 기억은 하지만 침묵하는 쪽을 택한다. 어느 쪽이든 심신을 찌르는 고통은 같다. “탄식은 체념 어린 침묵으로 변해서 그 불모시대의 울분을 장강대하의 술로 달랬다.” 그의 아버지는 고통이고 형벌인 그 기억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을 것이다. “오직 침묵과 체념만이 그나마 남은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스위스의 문필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은 인간의 고향이며 따라서 인간의 침묵은 귀향이라고 《침묵의 세계》에서 규정한다. 세상의 혼돈스러움에서 보이는 인간의 침묵은 분명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사라진 사회,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구성원의 주체적 결정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묵이다. 그래서 그런 침묵은 더욱 참담하고 애절하다. 잊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삶을 견디기 위해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하지 않으면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침묵은 모든 것을 수용하며 존재를 성숙하게 하는 행위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침묵의 지혜를 알고 있었다. 그것을 작가 안규수는 이렇게 적었다. “어디로 던지려는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고,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3. 이른 봄날, 아버지는 신작로를 걸어 읍내에 가다가 어린 학생이 탄 자전거에 치여 넘어지면서 도로변 벼랑으로 굴러 떨어져 환도뼈, 그러니까 골반뼈가 탈골되는 중상을 입었다.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당시에는 의료보험이 없었고 가해자인 어린학생 부모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을 헤아린 아버지는 치료를 거부했다. 작가와 아홉 살 터울의 형도 치료에 미온적이었다. 열일곱에 세 살 위 처녀에게 장가 들어 남매를 둔 형은 “당장 큰 병원으로 모시자”며 식음을 전폐하고 농성하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진 나이도 있으시고…, 전답 팔아 병원비 치르고 나면 우린 뭘 먹고 살거냐?”(〈아부지, 우리 아부지〉) 형을 조종하는 것은 형수였다. 형은 아버지를 큰병원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형수가 반대하는 눈치였다. 해방 전에는 유기장으로 재산을 일구어 전답도 사고 넉넉했으나 스테인리스가 등장하면서 찬밥이 된 유기鍮器로 인해 가세는 기울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 가족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그 사고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 나이 65세, 작가의 나이 16세 때였다. 이 일은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별세하기 전의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과 그 이후의 생활인의 삶으로 그의 인생이 나뉜다. 작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혼례를 치렀다. 손이 귀한 집이었기에 열일곱 살에 장가를 든 형에 이어 동생인 작가도 일찍 장가를 들었다. 대학 진학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면 산등성이 위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고 서러워했다. 한동안 농사꾼이 될까 하다가 그 꿈마저 접고 공부한다고 골방에 박혀 서너 달 지내기도 했고, 친구 집을 전전하면서 빙빙 겉돌았다.”(〈비긴어게인〉) 아마도 아버지가 별세하지 않았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했고 곧 자식까지 태어날 터이니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작가는 공무원이 되어 고흥 우체국에서 첫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작가를 지탱한 힘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이었다. 거기에 한 사람 더, 별세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 생의 고비마다 당신의 음성을 들었다. 당신께서 나를 일으켜주셨고 때로는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버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다. 이 세계는 어쩌면 죽어도 죽지 않는 아버지들의 건축물인지도 모른다.”(〈아부지, 우리 아부지〉)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여 일찍이 동양에서도 인간의 성품을 놓고 논쟁이 있었으나 필자는 인간의 성품은 출생 이후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굳게 믿는다. 남부러울 게 전혀 없는 재벌가의 손자들이 마약을 하는 반면에 쌀집 자식들은 아버지의 성실함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하는 게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자라면서 어떤 환경에 놓여 있고 어떤 가정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점에서 볼 때 안규수 작가의 인생은 아버지와 큰어머니, 어머니, 아내 같은 이들이 형성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가 강조하지 않지만 그런 흔적은 수필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는 늘 막내아들을 대견해했다. “우리 막내 잘한다. 달려라. 달려….” “놈(남)한테 뒤지지 말어. 글고 아까처럼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더 힘껏 달리면 돼. 우리 막내 오늘 너무 잘했다.”(〈아부지, 우리 아부지〉) 아마도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달리라는 아버지의 말은 작가로 하여금 평생을 자신 있게 살도록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큰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슴이 시린 추억을 갖고 있다. “날 낳아준 엄마보다 더 살뜰한 정을 주신 큰엄마다. 배고파 우는 날 안고 골목을 헤매던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분에게 한 번도 효도다운 효도를 해본 적이 없으니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큰엄마〉) 큰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작가는 내면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서러운 눈물이 거센 물결처럼 내 심장을 출렁이게 했다. 나 하나 바라보고 힘든 삶을 살아오신 엄마였다. 그 엄마의 눈물은 내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병사로서 월남전에 참전해 받은 수당을 알뜰하게 모았다. “어머니는 내가 매월 꼬박꼬박 보내준 돈을 모아 문전옥답 서 마지기를 장만하여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부모도 그렇지만 작가에게 가장 의지가 된 이는 아마도 아홉 살 위의 배다른 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도 형을 좋아했고 형도 동생을 아꼈다. 그 동생에게는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드는 형의 모습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장가드는 날 가마 타고 신부 집으로 향하는 철부지 어린신랑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장가가기 싫어 잔뜩 부어 있는 형과 달리 나는 형 가마 옆에 바짝 붙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갔다. 그때 형 나이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웃마을 세 살 위 처녀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마지막 일기〉) 안타깝게도 그 형은 불혹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소슬바람이 분다. 섬돌 밑에서 밤새워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프다.” 작가의 “아내는 누가 보아도 억척스러웠다. 그는 늦었다고 뛰는 법도 없고, 이르다고 쉬는 법도 없고, 힘들다고 태업을 한 적이 없다. 일정한 걸음으로 꾸준히 걸어 여기까지 왔다.”(〈비긴 어게인〉) 작가에게 형과 아내는 침묵 속에서도 안주할 수 있는 휴식처였다. 4. 작가의 아버지, 큰어머니, 어머니, 아내, 작가. 이들에게는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무거운 삶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았다는 점이다. 작가는 말한다. “지난 삶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유년의 뜰은 시간이 만든 현상이 아닌가. 실로 시간의 힘은 무섭다. 시간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시간의 구조물이면서 또한 시간의 잔해처럼 느껴진다. 갈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일들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 시간이 준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유년의 뜰〉) 누구인들 삶이 무겁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일탈을 반복하고 어떤 이들은 무게를 지탱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킨다. 이런 모습은 작가가 동네의 큰어른을 뵈러 가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난 설날, 동네에서 제일 고령이신 평촌 어른댁을 찾아뵈었다. 아흔을 넘긴 어른은 ‘왔는가’ 하시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참으로 어렵게 살았제’라고 하시면서 만고풍상의 흔적이 베인 주름진 얼굴로 웃고 계셨다. 배는 고파도 ‘사람답게 살았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불행할 수도 있었던 삶. 단지 대통을 잇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작가의 가족과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희수를 눈앞에 두고 동굴을 탐사하듯 자신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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