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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안규수의 '무진으로 가는 길'을 읽다 / 박 춘

by 안규수 2022. 2. 18.

  창작수필집을 읽는 것을 생각한다. 학창시절 긴 겨울방학 앉은뱅이 책상이나 따뜻한 아랫목 벽에 기댄 채 청소년문고의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던 기억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수필은 아무래도 대도시보다 소읍이나 작은 마을의 자연의 시간이 삶과 어우르는 장소가 읽기에 좋은 것 같다. 대도시 아파트의 환한 형광등불빛이나 자칫 어떤 절제와 의식이 들어설 수도 있는 도서관의 개방적인 곳 보다 혼자서 잠시잠간이라도 온화해진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수필이란 마음이 오가는 장르인 탓이다. 작가개인의 체험에서 발현되는 감정선을 따라가고 일체화를 구하는 때문이다.
 한권의 수필집은 한 생의 귀환여정의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수필은 돌아봄에서 찾아내는 자신과 우주인 탓이다. 돌아본다는 것은 재인식한다는 의미다. 재인식은 그냥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사물과 사태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묻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글로 정립한다는 점이다. 돌아봄을 창작으로 연결한다는 의지를 말한다. 창創은 처음으로 없던 것을 생성시킨다는 뜻이고 작作은 원래 없었던 무엇을 지어내는 일이다. 그러니 창작은 돌아봄을 정태적인 것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대한 태도 실천과 연결된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다. 수필을 쓰는 것이 건강한 삶을 찾아가는 안내역을 하는 셈이다. 때로는 미친 마음의 질풍노도처럼 때로는 봄날의 따사로운 미풍처럼 때로는 세상 쓴맛 단맛 다 보아버린 노회한 처지이듯 그러나 아침 이슬 같은 명료한 맑은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발견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건 크건 하나의 경이를 느꼈을 때 시작된다. 경이를 충격이라거나 충동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그것에서 느낌을 잡아채고 사유를 통해 서사화 시킨다. 첫 수록작품 ‘작은 꽃이 아름답다.’의 첫 구절은 ‘봄 햇살이 포근하다. 숲 사이로 정겹게 나 있는 산길을 따라 걷는다. 깊숙이 들여 마신 공기가 참 달다.’로부터 출발한다. 이어서 중학교 3학년수학여행, 화엄사를 출발하여 노고단을 거쳐 천은사로 내려오던 추억을 되새긴다. 작가는 ‘정지된 시간이 느리게 따라오고 있다.’고 감회를 적었다. 중3의 수학여행은 작가의 첫 지리산 탐방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모습이 재현되고 현재의 모습이 덧씌워 포개진다. 상선암을 찾고 암자 주위에 화원을 이룬 작은 토종민들레를 발견하고 토종민들레와 서양민들레의 생장을 비교하며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우리네 여인의 삶에 견주어 놓는다.

  지리산 종석대 아래 암자에서 생명의 이치를 떠올린다. 작다고 꽃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식물의 생김새에 궁금증을 갖고 관찰하다보면 작은 꽃 잎새에 이들이 살아온 역사와 사연이 보인다. 이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는 우리의 가난한 백성의 기상과도 닮은 듯하다. 이렇듯 우리 토종 민들레 꽃은 작은 몸으로 세상을 넓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 인생이 저 작은 민들레처럼 소담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저 민들레처럼 살고 싶다. (작은 꽃이 아름답다)


  수필은 사물이건 사태이건 개인의 경험에서 시작되고 구체적 사실들로 서사화 된다. 서사는 이런저런 사건과 사물 사태가 여기저기 장소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에 관한 묘사로 순수하게 진술하는 하나의 태도다. 물론 체험의 서사만으로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사 속에는 서사구조 과정에서 실재사태를 분해하고 다시 뜯어 맞추는 작가의 사유과정이 들어있다. 글을 쓰면서 작가는 체험을 재인식하게 된다. 재인식에는 작가가 찾아낸 자신만의 독창적인 모습이 없는 듯 내포된다. 실은 그 독창성이야말로 작가와 작품의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어는 ‘손가락 총’이었다. 운동장에 잡혀온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붉은 완장을 찬 젊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곧 바로 끌려갔다. ... 소화다리 난간에 일 열로 세워놓고 발목에 새끼줄을 묶은 뒤 방아쇠만 당기면 다리 밑으로 사라졌다. ... 작은 누나는 남편의 시신을 찾은 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 삼년 여를 그렇게 앓던 누나는 스물 넷 젊은 나이에 두 살배기 딸을 남기고 기어이 남편 곁으로 갔다. (손가락 총)

  박물관 전시실에는 반세기도 넘은 전쟁의 상처가 시간이 정지된 채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사진의 가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는데 있다. 네이팜탄에 검게 타버린 시체. 고엽제로... 그중에는 우리나라가 파병한 한국군이 작전 중 학살한 민간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을 쏜다는 건 이미 전쟁이 아니다. 그건 살인이다. 전쟁의 목적과 경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기억 되어야할 죽음과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는 미국인 관람객 가운데에는 초라한 내 모습도 있었다. (기억되지 못한 그날의 이야기)


 수필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체험의 장르이지만 그 안에는 그만이 가진 사회사적인 기록과 비평의 시선이 깃들어있다. 시대를 자기 삶 속에 끌어안는다는 의미다. 시대를 자기 것으로 산 흔적이다. 하나의 사태는 당장에는 주관적 한계에 머물기도 하지만 시간의 힘이 통찰이라는 분별에 이르도록 한다. 더불어 체험과 사실에 대한 묘사가 시대상과 가치를 분별하게 하는 과정을 만든다. 그 탓에 수필이라는 장르는 타 장르보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더 많이 함축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힘(권력)은 책임이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힘)은 폭력에 불과하다. 책임지겠다는 각성도 책임에 대한 인식도 의지도 없는 것은 폭력의 전형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지고 나면 반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을 치루지 않으면 반성할 자격조차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날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을 수밖에 없다.

  오줌 한 방울 소중했던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지동아재는 알뜰한 것이 지나쳐 염치없는 사람으로 아버지의 빈축을 샀다. 긴 겨울밤 우리 집 사랑방에서 밤참을 대접받고는 오줌이 마려우면 슬그머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꼬박꼬박 자기네 오줌단지에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
눈발이 휘날리는 풍세風勢 사나운 날, 엄마가 오일장에 다녀오시면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참꼬막국 밥상이 차려졌다. 우수수 울타리를 할퀴고 가는 매서운 바람소리와 달리 방안은 화롯불의 온기로 그지없이 안락했다. 그날 밥상머리의 조건은 진수성찬과는 상관이 없었다. 식구 중 아무도 그 추위 속에 나가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드신 것이다. “참 좋다.” 아버지는 그렇게도 좋으신지 한숨처럼 말씀 하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유년의 뜰)

 수필은 어떤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다. 경이든 경외든 충동이든 충격이든 그것이 나를 무찔러 오는 것이다. 그것을 감동으로 엮어내는 언어작업이다. 긴 겨울밤 빈축을 사고마는 지동아재의 행실은 당시의 시대상과 삶의 절실함이 무엇인지를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탓에 기름진 흙이 되고 병충해 없는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말한다. 생태적으로 살아있는 흙이 될 수 있어서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엄마가 엄마만의 맛있는 추어탕을 끓였다고 적는다.
풍세 사나운 겨울밤과 밥 짓고 국 끓이는 정제(부엌)를 밝히고 있는 어슴프레한 30촉짜리 전등불과 혓바닥을 날름거리거나 이제는 은근해진 아궁이의 붉으스레한 불빛과 서린 김 사이로 보이는 종종거리는 엄마와 안방의 자글거리는 불을 안으로 숨죽인 화롯불과 하얀 무명옷의 저녁상을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와 간혹 부르르 떠는 문풍지. 엄마의 종종거리는 몸짓과 아버지의 조용한 기다림과...
 ‘그날 밥상머리의 조건은 진수성찬과는 상관이 없었다. 식구 중 아무도 그 추위 속에 나가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드신 것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작가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을 돌아보는 시선이 어찌할 수 없는 모습으로 넘실거리게 만든다. 작가는 ‘유년의 뜰은 시간의 현상이 아닌가. 실로 시간의 힘은 무섭다. 시간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힘도 가지고 있다.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 시간이 준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고 시간과 삶의 무게를 되새겨놓고 있다.

 고향마을 앞에는 수백 년 묵은 마을의 수호신 둥구나무가 있다. 나는 이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수백 년 누적된 연륜이 자아내는 경외감을 느낀다. 또한 ‘너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라며 부드럽게 꾸짖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세기동안 고향을 등지고 살다 고향을 찾아 이 고목을 바라보면 공연히 눈물이 난다.
골목을 지나 옛집으로 들어섰다. 그을음에 그을린 집은 마치 노모의 가슴팍처럼 빈약하기 그지없다. 안방에 시간이 멈춘 벽시계를 바라보니 잃어버린 시간이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이집에서 대대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았던 유순한 사람들, 그들의 생명은 대를 이어 나에게까지 닿았다. 나는 유일하게 남은 이 터전의 흔적이다. 아버지와 엄마와 큰엄마, 하나밖에 없는 형, 그리고 작은 누나와 매형, 떠나간 모든 이들이 이 터전을 거쳐 갔다. 그들이 일시에 내안에서 웅성거린다. 그분들 곁으로 내가 떠나면 이 집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둥구나무)

 오래된 시간의 층에 한 가족과 한 생애의 풍경이 음영으로 남아있다. 자취의 흔적에 닿는 마음이 웅성거린다. 누군가 물레 난간에서 톱질하다 낸 흠집자국. 사랑채 툇마루 벽에 누래진 채 벽에 붙어있는 입춘대길. 헛간 기둥에 박혀있는 녹슨 쇠못. 한켠에 뼈대만 남은 채 버려진 아버지의 마당 빗자루, 살았던 이들의 무수한 흔적들을 보고 있다. 흔적들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들에 이어지고 닿는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실은 표현이 이상하지만 느낌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웅성거리는 진실을 마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역정歷程이다. 같은 산문이지만 소설은 허구라는 바람막이가 있지만 수필은 자기 체험의 진정성이라는 허허벌판에 그냥 서야한다. 자아가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앞에 벌거벗는 것이다. 그것에 발목이 잡혀 표현과 소재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서구는 기독교의 ‘고해성사’의 전통 탓에 자아를 드러내는 것에 관대하지만 우리 정서는 오히려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 미덕이었던 세계를 살아온 터이다. 그러니 자아를 드러내야하는 수필을 쓰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럼에도 여기 안규수 작가가 그동안 써 모은 글을 모아 한 권의 수필집으로 세상에 내 놓았다. 미련한 사람이 미욱한 감상문으로나마 첫 작품집의 상재를 축하드린다. 그리고 책을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202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