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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기억의 재현, 삶의 기록 / 이운경

by 안규수 2021. 11. 6.

   <안규수 작품세계>

 

   1. 이야기의 힘, 서사

 

   글쓰기는 생의 불가피성에 도전하는 최후의 몸짓이다. 꿈결처럼 흘러가버린 시간의 가역성을 마침내 수긍하고,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되살려내기에 글쓰기만한 것이 있으랴. 가히 한 생애를 살아낸 이의 발화들은 시·공간의 무늬를 품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수필작품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빛과 그늘, 휴머니즘과 생태주의의 세계가 담겨 있다. 아울러 한 존재가 가슴 깊숙한 곳에 품고 있었던 심연深淵을 보여준다. 작가의 발자국이 지나간 공간이라는 수평과 시간이라는 수직이 교직하는 무수한 좌표가 있을 터, 어쩌면 수필 쓰기란 그 좌표 위에 자기만의 문양을 새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흔 생애를 살아온 발자국에는 월남전의 상흔과 청춘의 흔적들, 가족사의 아픔과 따스한 추억, 아내와 손자를 향한 애틋함, 산행을 통해 온몸으로 느낀 감흥과 자연으로의 회향回向 열망 등이 곡진하게 담겨 있다.

 

  때로는 유속에 안절부절 떠내려간 시간이었다. 흐름도 깊이도 알지 못한 시간이었다. 마을 앞 개울은 오래전 출렁이던 내 고통의 물결을 흔적도 없이 지운 채 말간 얼굴로 다가왔다. 내 글의 근원이 거기 있음을 알았다. (중략)

타고난 이야기꾼인 큰엄마는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은 고생담을 담담히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들이 이 책의 주류를 이룬 뼈아픈 가족사가 되었다. 내 가족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아픔이고 통한의 역사였다.

                                                                                                      ―「책머리에에서

 

  안규수의 글은 시골집 처마 밑에 걸려있던 액자 속 흑백사진들을 하나씩 글로 풀어놓은 듯하다. 한 장의 사진이 좌표의 한 지점을 포착하여 시·공간의 기억을 저장한다면, 수필은 정지된 화면을 열고 그 사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캐내고 연결하는 작업이다. 화자는 기억이 시작하는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점이 흩어져 있던 파편화한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연결한다. 이때 동원하는 연결의 방법이 서사 즉 이야기하기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수필의 공간이란 매몰된 기억을 끄집어 올려 미학적 서사물로 재생하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환언하면 산포되어 저장된 기억들을 연결하고 꿰매는 과정에서, 그 사건들은 우연성에서 전후 맥락을 가진 필연성으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이해와 용서, 화해의 세계가 열린다.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안규수의 수필이 서사와 결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수필 쓰기의 자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존적 존재로 살아온 다자인(Da Sein/ 존재자)의 근원을 탐색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희생된 가족사의 회고回顧을 통해 자기치유와 정서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개인사나 가족사는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화자에게 수필 쓰기가 어떤 소명 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방법론으로서 이야기하기 즉 서사적 양식을 선택한 연원을 밝힌다. 이 두 가지는 안규수 수필을 규정하는 특질이면서 동시에 수필가의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기억의 재현 방식이며 욕망의 표현 방식이다.

  수필에서 이야기하기는 치유적 역할도 수행한다. 존재의 본질적 비극을 인식하고 상처를 봉합하고 화합하는데 유용한 도구로서 작동한다. 화자의 이야기는 말할 수 없었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상처와 회한의 상자를 개봉한다. “어려서 엄마에게 가면 큰엄마에게 멀어졌고 큰엄마에게 가면 엄마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둘을 잇는 끈이면서 동시에 줄 사이의 벽이었다(영원한 모상母像).”처럼 큰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어린 자아는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수필의 장에서 이야기하기를 통해 생의 얼룩과 그늘을 응시하고, 해원解寃의 굿판을 연다. 마침내 큰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낀 존재였던 아버지와 어린 자아를 다독이고 해방시킨다. 마치 개울물이 흐르면서 스스로 정화하듯이 자기승화의 과정을 거친다.

  서사는 그의 수필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하나는 이야기하기의 체험을 통한 수필 쓰기의 동력으로서, 다른 하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공감의 역할이다. 화자가 성장기에 큰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글쓰기의 출발지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낸 이들의 생생한 경험담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드라마이다. 이야기는 삶의 개별성과 구체성에 충실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려는 몸짓이었다. 화자는 이야기의 기억을 글로 재현한다. 큰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에다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로 보탠다. 서사가 겹치고 겹치면서 역사의 산맥이 형성된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역사가 이야기로부터 발원했고, 이야기로 전승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글쓰기의 과정은 나와 세계와의 관계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특히 수필 쓰기는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중심으로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안규수도 수필의 장에서 이야기하기를 실행하면서 실존에 매몰된 자아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운명적 존재인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도 입고 위안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포함한 경험과 기억의 총체를 지칭한다. 개인적 글쓰기인 수필 쓰기는 시간 속에 매몰된 자아를 발견하고, 역사적 주체로 승격시키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개인적 생애사가 역사적 영토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 혹은 다리가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교량이 서사이다.

  서사는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또한, 언어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를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야기는 기억을 되살리는 효과적 방식이며, 기억을 저장하는 수월한 방식이기도하다. 사건을 전달하는 방법으로도 즐겨 활용한다. 가령 문학과 음악, 연극적 요소를 모두 지닌 종합 예술 양식인 판소리가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감의 교량이며, 나아가 감동의 물결이 일어나게 만든다. 개별적 경험을 타자들과 나누고 공감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서사라는 교량을 건너가면서 마침내 공간의 지점에 다다른다. 요컨대 안규수 수필의 특질인 서사적 양식은 개인적 이야기에서 출발한 수필이 보편적 공감으로 나아가는 교량이 된다. 그래서 가족사의 비극이 역사와 맞닿는 지점을 찾아내고, 내재된 아픔을 치유하고 승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자연주의적 감수성과 생태의식

 

  안규수의 수필세계 저변을 흐르는 자연주의는 작가의 세계관이자 이상향으로 수렴된다. 작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이 농촌사회였고, 농경시대의 자연 친화적 정서가 뼛속 깊이 침윤한 까닭이리라. 이런 자연 친화적 정서는 평생을 지배하는 기저정서로 자리 잡는다. 자연은 유년기의 행복한 놀이터였으며, 어린 자아를 품어주던 엄마의 품과 같은 곳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거나 혹은 도의 도달점으로 자연을 상정하기도 했다. 자연주의는 한국문학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아로서 작동하기에 이른다. 문학에서 자연은 문화적 기호이다. 원초적이고 물질적인 자연이 아니라 어떤 문화적 가공물로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거나 작품의 내적 구조라는 지평에서 의미발생을 한다. 현대수필에서도 자연은 심미적 대상으로 자주 호명되고, 나아가 삶의 이치를 깨치는 철학적 지위를 가진다.

  안규수의 작품에서도 자연은 절대적 지위와 역할을 수행한다. ‘이라는 명사로 상징되는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자연, 화자의 상상 속 이데아로서 자연, 인간과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자연 등이다. 거의 대다수 작품에서 자연은 생의 일리一理를 깨치게 해주는 스승과도 같다. 전주곡처럼 도입부분의 배경으로 등장하거나,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성장기의 기억을 간직한 저장고로서,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이상향의 상징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반영의 거울 등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산행기에서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융화하는 자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면모들은 자연 혹은 자연주의가 작가의 무의식과 의식을 견인하는 절대적 가치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수필세계를 관통하는 자연은 존재의 본원으로 돌아가려는 귀소歸巢본능의 발현, 나아가 문학적 정서의 원형原形으로 작동한다.

 

  지리산 종석대 아래 암자에서 생명의 이치를 떠올린다. 작다고 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식물의 생김새에 궁금증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작은 꽃 잎새에 이들이 살아온 역사와 사연이 보인다. 이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는 우리의 가난한 백성들의 기상과도 닮았다. 이렇듯 우리 토종 민들레꽃은 작은 몸으로 세상을 넓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 인생이 저 작은 민들레처럼 소담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저 민들레꽃처럼 살고 싶다.

                                                                                                  ―「작은 꽃이 아름답다에서

 

  자연은 작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자 작가의 관념과 가치를 지배하는 중심기재이다. 이 작품은 안규수 수필이 지향하는 자연관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자는 상선암 주변의 토종 민들레를 통해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과 고난과 도전의 역사를 사유한다. 화자의 관심과 시선은 사찰이나 암자 같은 건축물보다 그 건물을 둘러싼 나무와 꽃, 산 등 자연물에 주목한다. 그런 다음 자아를 대상인 자연에 깊이 투사한다. 이런 태도는 자연을 지각으로 인식하기 이전의 원형적 감각 혹은 행동 이전의 반사작용에 가깝다. 화자에게 자연은 물질 이전에 존재의 근원적 본향本鄕 같은 것이다. 요컨대 안규수 수필에서 자연은 인간과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면서, 모순과 갈등을 화합하는 이상향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밖에도 자아를 자연에 투사하고 성찰하는 작품이 많다. 곱게 늙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고색창연한 선암사의 풍광에 빗댄 선암사처럼 늙어라와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통해 살아가는 원리를 발견하는 한 송이 꽃을 피운다는 것은, 귀뚜라미를 통해 격랑의 시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귀뚜라미등이 있다. 작품 유년의 뜰에서는 농사꾼 아버지의 소박한 꿈, 겨울철 농가의 풍경 등을 세세히 묘사하고 설명한다. 자연 속에 뛰어놀았던 유년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시간의 힘을 자각한다. 둥구나무새벽닭 우는 소리같은 작품에서는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자연파괴를 비판하는 생태주의적 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과 관련한 기억과 정서를 수필에서 구현하는 것은 화자의 감각이 자연을 향해 열려있고, 자연과 깊게 교감하는 감각체계를 갖추었음을 입증한다. 이처럼 자연을 향해 열린 감각체계는 그의 수필을 풍성하게 해주는 자원이며 서정성의 토대이다. 화자에게 자연은 삶의 교과서이며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경전과도 같다. 대다수 자연수필에서 인간과 자연이 대등한 위치에서 자연과 상호교감하던 농경사회의 전통적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주목할 지점은 지금까지 수필이 보여주던 자연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을 대등하게 사유하는 생태주의로 승화했다는 사실이다. 자연을 관조하거나 예찬하던 한국수필의 자연관에서 한결 성숙한 생태주의적 면모를 보여준다. 요컨대 안규수의 자연수필은 한국수필의 협소한 자연관을 생태주의로 확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역동성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드러나는 구체적 현실은 다양한 관심과 주장에 따라 부단히 켜지고 꺼지는콘텍스트들의 역동적 연계망이다. () 하나의 주장이나 판단, 혹은 표정이나 느낌까지도 스스로의 유의미성을 보장받는 원천으로서의 고유한 콘텍스트를 지닌다. ‘식별로부터 인식이 출발하고, 그 식별은 차이와 대조의 감각임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면, 자신의 콘텍스트를 달고 다니지 못하는 텍스트가 제대로 이해될 리 없기 때문이다.

                                                                     ― 김영민, 인간의 글쓰기, (글항아리, 2020, 227).

 

  수필이 가장 수필다운 글이 되려면 개별적 존재자가 살아온 세월의 복잡성과 삶의 층위를 의미 구조 속에 잘 엮어내어야 한다. 특히 역사적 격동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세대는 사건이나 기억을 둘러싼 콘텍스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실 개인의 삶이란 그를 둘러싼 사회·역사적 배경 안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동일한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각자의 기억도 다르고 해석도 다르다. 이런 차이와 대조 안에서 사건은 그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통해서만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한 생애를 수필이란 그릇에 담아내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사건 혹은 기억만 가지고는 비좁은 우물에 갇히기 쉽다. 현대수필이 가진 치명적 한계는 텍스트의 자폐성이다. 오롯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텍스트는 한 송이 꽃처럼 외롭고 위태롭다. 어쩌면 꽃의 아름다움은 잡다한 들풀 속에 있을 때 더 빛날 수 있다. 들판이 콘텍스트라면 꽃은 텍스트이다. 이 둘의 관계성 안에서 꽃의 아름다움은 생성된다.

  현대수필은 크게 두 개의 줄기로 분화하고 있다. 한 갈래는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안에서 길어 올린 나만의 울림과 생각을 드러내는 독백형의 글, 다른 한 갈래는 안방을 박차고 나가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콘텍스트를 끌어와 입체적으로 글을 쓰는 부류로 나뉜다. 이런 패턴화는 자신의 삶에 적합한 개성적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수필의 진화로 볼 수 있다. 수필가 안규수는 후자이다. 한두 개의 화소를 배치하고, 의미화를 향해 나란히 줄 세우던 평면적 텍스트를 거부한다. 화자의 발걸음은 분주하다. 공간의 이동도 빈번하고, 화소들도 여럿 동원한다. 비유컨대 직선형 고속도로가 아닌 꽃과 나무와 새들이 함께하는 숲길이다. 그래서 구성이 단조롭지 않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계와 파편화한 관계는 인간이 마주한 국면(텍스트)와 후면(콘텍스트)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가하면, 망원경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있다.

  인문학자 김영민은 삶의 모습에 알맞은 글쓰기가 되려면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역동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김영민, 같은 책, 305)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수필에 빗대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가령 첫날 밤이라는 작품을 보면 아내와 첫 만남부터 부부의 연을 맺고 우여곡절의 협곡을 건너온 이야기다. 이 글의 중심화소는 나와 아내이다. 그런데 이 글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복잡다단하다. ‘아내의 첫인상과 만남 전통 혼례식과 첫날밤 공무원 합격과 자녀들 출산 얇은 월급봉투와 자녀양육 사교춤과 부부의 위기 여유를 즐기는 아내의 생활 순천만을 바라보며 하는 부부의 다짐등으로 엮어진다. 부부가 함께 걸어온 세월을 통해 견결하게 이어진 신뢰와 믿음, 연민의 감정은 한두 개의 서사로는 말할 수 없다. 사건이 일어난 정황이나 그 사건이 품고 있는 복잡다단한 배경을 함께 제시한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한 시간들(콘텍스트)과 사건(텍스트)의 긴장감과 관계성에서 생의 복잡성과 삶의 역동성이 솟아난다.

  또 다른 작품 무진霧津으로 가는길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화소들이 등장하여 다채로운 문양의 콘텍스트를 이룬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 동천 물길을 따라 걷는 길 동천이 품은 사라호 태풍과 비극 순천만 국가정원 둑길을 걸어 도달한 문학관 순천만과 갈대숲 갈대밭과 흑두루미 방죽길 신경림의 시 비움의 삶콘텍스트의 숲이 실로 풍성하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출발한 작품은 동천 물길과 순천만 국가공원, 둑길을 지나 순천만 갈대밭에 이른다. 순천만이라는 공간 사이사이에 사라호 태풍도 나오고 문학작품도 등장한다.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과 화자의 상상이 길항拮抗하면서 뿜어내는 서정성과 긴장감이 역동적이다. 텍스트에 제한되는 평면적인 작품은 안점감과 깊이를 확보하지만 정태靜態적이다. 그러나 안규수의 작품처럼 텍스트와 콘텍스트와 길항 작용을 통해 역동성을 추구하는 작품은 풍성하고 입체적이다.

  콘텍스트의 복잡성과 역동성은 세계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삶의 복잡성 속에서 삶의 일리를 건져 올리는 수필은 범속함과 친숙함에 내재한 의미를 채굴하는 일이다. 사건이 잉태한 배경과 진행과정, 그 사건이 화자에게 남긴 흔적 등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역동적 에너지가 발생한다. 안규수의 수필작품이 지향하는 역동성은 작가의 스타일과 맞물린다. 고인 우물보다 흐르는 강을 선호한다. 한곳을 주시하고 응시하기보다 주변부의 풍경이나 이야기를 배경 음악처럼 깔아 화자가 의도한 의미를 서서히 부조浮彫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방식은 단면적 구성이 주는 지루함을 해소하고 열린 주제를 지향한다. 주체의 의도와 계획대로 이끌고 가기보다 독자에게도 해석의 권한을 양보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 독자는 화소들 간에 부대끼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역설을 즐기면 된다. 이런 점에서 안규수의 작품은 수필의 미학을 확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기억하기와 시간체험

 

  기억하기란 단순히 기억된 대상을 복원하는 작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주체의 깨달음이 침투해 있는 어떤 과정이다(최성만,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14). 이 전언을 수필에 적용하면 수필쓰기에서 핵심 요소인 기억하기는 과거의 경험들을 현재적 시선에서 회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관념적 기술이나 포괄적 개념 속에 매몰된 자아의 기억을 되살리고 개별적 존재의 역사성을 구축하는데 서사적 양식은 수필의 본질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수필의 핵심 요소인 개인의 기억과 서사적 기술은 체험의 개별성과 단독성을 재현하는데 유리하다. 어떤 사회적 관념이나 일반적 범주로 흡수되지 않는 고유한 경험과 감각, 특질 등을 바탕으로 타자들과 연대하는 공감의 광장으로 나아가게 한다.

  수필은 경험을 토대로 하는 장르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은 곧 망각의 늪으로 들어가 무의식에 저장된다. 특히 전쟁 같은 비일상적 체험은 상황에 대한 총체적 판단이나 인지적 자각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체험의 빈곤상태에 놓인다. 근대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전통적 체험 양식인 종합적 체험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의 체험양식인 사건적 체험을 경험한다. 사건적 체험은 특별한 시간체험을 유발한다. 사건적 체험은 잠재적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특정한 계기에 의해 파편화된 이미지로 떠오른다. 이처럼 사후방식으로 귀환하는 사건의 순간은 시간의 영속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카이로스적 회상이다. 가령 고향마을 뒷산의 잿몬당 소나무가 사라진 것을 보는 순간 칠십여 년 전의 여순사건이 떠오른다든가, 베트남 호찌민시의 전쟁증적박물관을 방문하면서 베트남전 참전 사건이 솟아오르는 식이다.

  이처럼 사건적 체험 속에서 기억은 인과적 형태로 회귀하지 않고 분화된 채 떠오른다. 이런 경우 기억은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무거운 억압과 망각의 표피를 뚫고 솟아오르는 일종의 각성이다. 회상의 순간에 흑백의 사진처럼 떠오르는 사건적 체험의 순간은 분절된 시간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사건의 소외된 기억과 시간을 회복하고 연결하는데 서사라는 양식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회상과 서사가 결합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고, 망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원체험을 경험한다. 기실 사건의 기억은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진 채 무연無緣하게 흩어져 있다. 서사적 양식은 닫힌 시간의 문을 열게 하여 사건 발생의 그 시·공간으로 돌아가도록 해준다. 마치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호그와트 기차표처럼. 요컨대 서사양식은 파편화한 기억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재배열하여 현재적 시간으로 환원하는 데 유용하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전쟁의 끔찍한 실상을 보는 순간 그동안 지켜온 나의 자부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잊히지 않는 그날의 일들은 달리 생각해 보면 내 잘못이나 죄가 아니다. 그럼 누구의 죄일까. 이 말을 곱씹을수록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너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종료된 일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봉합될 수 없는 상처를 계속 바라보는 일이다.

                                                                                       ― 「기억되지 못한 그날의 이야기에서

 

  화자의 베트남전 참전 기억을 회상하는 이 글은 기억과 회상, 시간체험의 실상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글의 제목에서 보듯이 전쟁이란 참혹한 체험은 기억되지 못한 그날로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었다. 전쟁증적박물관에 들러 유물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화산 폭발하듯이 분출했으리라. 화자에게 전쟁의 기억이란 참혹한 상처와 함께하는 폭력이었다. 화자에게 전쟁은 메타포나 알레고리로 환원할 수 없는 실체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사건체험은 현실에는 부재不在하지만, 생생한 체험으로 되살아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지각과 감응이라는 일반적 문법 대신 재현과 재확인만이 가능하다. 전시실에 들어가 그날의 실상과 만나는 순간 내면에 자리한 감각체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화석화한 전쟁의 기억은 전시실의 유물과 접속하면서 균열이 오고 기억은 해체된다. 수필은 그 기억의 균열과 해체 이후 재배치와 재통합의 산물이다.

역사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발굴되고 재해석된다. 수필은 개인이나 가족사를 기록하는데 유용한 장르이다. 역사란 것도 한발 들어가면 개인의 사건에서 출발한다. 안규수의 수필집에도 역사성을 품은 작품이 많다. 여순사건과 가족사의 비극을 재현한 손가락 총, 월남전 참전을 쓴 기억되지 못한 그날의 이야기정글은 말이 없다등은 기록문학으로서 가치가 있다. 가족사를 소재로 쓴 아부지, 우리 아부지, 엄나무 가시, 영원한 모상母像, 이런 고백같은 작품도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역사와 연결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본래 수필쓰기란 부조리와 아이러니로 점철된 세속의 표상表象이지만, 전복과 해체를 통해 새로운 법전法典을 세우기도 한다. 부러진 나무토막처럼 훼손된 채 망각의 늪에 매몰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온전히 회복하여 상처 입은 자아를 다독이고 삶의 총체성을 복구하는 소중한 과정이다.

  개별적 가족사가 보편적 역사로 확산하는 동력은 인식의 제국주의를 벗어나 타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자리의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도그마에 묻혀버린 사건과 죽음은 표어처럼 표정도 없고 자의식도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무질서하고 무한하며 다양하다. 개인의 무의식에 각인된 사건의 체험은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형체와 영혼을 드러낸다. 화자의 가족사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아픔이고 통한의 역사이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작품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어간 백성들의 아픔과 분노, 상처를 증언한다. 구체적이고 개별적 사건은 역사라는 거대한 관념을 뛰어넘는다. 이런 면에서 문학은 역사보다 강하다. 안규수의 수필은 리얼리즘 문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기록 문학으로서 지위를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