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風磬 달다 / 안규수
바람은 오랜 친구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다. 미지의 머나먼 숲에서 출발해서 스치듯 금세 어디론가 사라진다. 바람만 그럴까. 내 마음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존재했다가, 찰나인 듯 사라지는 게 바람을 닮았다.
그런 바람을 만나는 방법은 따로 있다. 지난여름 제주 영실 계곡 깎아지를 듯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 병풍바위 쉼터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씻어 주고 가슴에 안기는 바람, 그 시원한 맛은 나만이 안다. 바람은 혼자 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함께 온다. 봄바람이 사랑스럽고 가을바람이 쓸쓸한 건 온도 차 때문은 아니다. 바람에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정호승 시인은 ‘풍경 달다’에서 바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아 시를 쓰면 ‘풍경 달다’가 된다고 했다. 풍경은 먼 데 놓인 사랑의 기원이다. 그 기원을 바람이 품고 와 가슴을 후빈다. 묻힌 언어들이 씨감자처럼 둥글둥글한 씨알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다. 풍경은 곧 바람의 실체다.
글은 곧 사람이다. 생긴 대로 쓴다. 섬세한 사람은 섬세하게 쓰고 묵직한 사람은 묵직하게 쓴다. 막상 글을 쓰다 보면 꽉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머릿속에 다 있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만 있는 글은 글이 아니다. 요즘 나는 두 발로 글을 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막힌 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기어 나온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무려 3년을 주 무대인 벌교와 지리산 일대를 헤매고 다닌 그의 발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하는 글쓰기는 상대편이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공격과 방어, 풋워크를 연습하는 섀도복싱처럼 지금 허공에 잽을 날리고 있는 거라고. 머릿속에 다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글은 현장에서 발품을 팔아야 한다. 몸에서 달구어지고 생성된 글이 좋은 글이다.
봄이 오면 뜰에 핀 매화, 섬진강 천변에 화사하게 핀 벚꽃을 벗 삼으며 기쁨을 얻고 외로움을 달랜다. 요즘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많은 것을 끊었다. 술을 끊고, 불필요한 관계를 끊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동안 연을 맺고 교류하던 무슨 단체의 감투를 모두 벗어던지고, 이곳 순천에서 시인, 수필가 등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통해 남도의 산수 풍광을 즐기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 순천만 습지, 국가 정원, 조계산 품 안 선암사, 송광사 등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찰, 푸른 숲 아름다운 꽃 속에 묻혀 산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먹고 자고, 숲길을 걷고, 명상하고, 때론 삶이 지루하면 여행길에 오른다. 자주 찾는 섬, 제주에서 곶자왈 동백 숲길을 걷고, 영실에서 한라산 남벽을 오르면서 자연의 순수한 풍경이 거저 주는 향기로움을 즐긴다. 이처럼 삶이 단순해지니 책 읽기와 글쓰기에 탄력이 붙었다. 삶에 더 여유가 생기고 활력이 넘치며 약동했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단순히 사는 삶은 신이 주는 선물이고 축복이다.
인생은 짧다. 아침에 해가 금세 황혼 녘을 맞는다. 인생이 이토록 바쁘게 지나가니, 덧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은 계절이 바뀔 때 자주 찾아든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질 때, 나는 우울해진다. 죽음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다. 본디 삶은 음양과 마찬가지로 한 몸이 품은 둘이니, 둘은 하나다. 삶이 품은 씨앗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품은 씨앗이 곧 삶이다.
나이 50을 넘기고 나의 숨은 글쓰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호루라기를 불 듯, 칼로 이름을 새기듯, 때로는 구멍이 난 종이로 별을 보듯이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 그 사이 어느새 또 스무 해가 훌쩍 흘렀다. 불멸을 원하지 않아도, 상상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길 염원하지 않아도, 글을 쓸 이유는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눈먼 부엉이의 노래, 바람과 파도의 외침, 늑대들의 울부짖음, 땅이 내쉬는 한숨이다.
고통과 불행을 스스로 감내하는 일이다. 내가 동양화를 좋아하는 건 넉넉한 여백 안에 사람이 있어서다. 자연이 아름다워도 거기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수필 속에는 분식되지 않은 ‘나’가 있다. 일상에서 어떤 충동을 받으면 글로 형상화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 대상과 밀애가 시작되고 그 속에 몇 날 며칠을 묻혀 씨름한다. 그 시간은 주로 이른 새벽이다. 생생한 현장감은 그때 얻어진다. 늘 하는 고민이지만 글은 그 사람의 그릇만큼 쓸 수 있다고. 그 그릇을 키우는 일이 독서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읽은 수필 중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수필이 더러 있다. 그런 작품을 떠 올릴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타산지석은 원래 못난 돌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나의 못난 글도 못난 글대로 누군가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으므로 용기를 내서 글을 쓴다. 이처럼 내가 글을 써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 나는 그때 조계산 도선암道詵菴 부근을 걷고 있을 때, 그윽한 풍경風磬이 울고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때로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믿는 어느 고행승이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뜰을 홀로 걷고 있다. 그 노승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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