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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숲의 노래

by 안규수 2023. 12. 2.

                                                                         

         그리운 시절은 여름에 있다. 여름이 젊음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운 한라산, 한라산 곶자왈 숲길은 나의 숨은 사랑이다. , 제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이름이 참 예쁘다. 그중에서도 여름은 특별하다. ‘이라고 발음할 때 혀가 입천장을 부드럽게 스친 후 입술이 닫히며 마무리되는 일련의 움직임이 좋다. 이 발음이 여름이라는 계절의 푸른빛과 잘 어울린다. 자연은 사계절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기이하다. 그 균형은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라산 곶자왈 숲을 좋아하게 된 건 20여 년 전부터다. 올여름은 지구 곳곳이 홍수 산불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불쾌지수가 치솟는다. 나 홀로 새벽 1, 여수에서 배편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섬을 찾았다.

  가끔 폭풍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까닭 없는 울분과 삶에 지쳐 맥이 풀리고 가슴이 시리면 여행을 떠났다. 푸른 바다, 숲의 초록 물결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맑아졌다. 초록이 숨 쉬는 공간은 어디든 좋았다. 누구든 나이 들면 녹색갈증이 커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숲은 자연 항암제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숲에서 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우울증을 개선한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다.

  열세 살 때,  다른 가로수보다 잎이 무성한 팽나무.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그 나무 옆에 서서 이야기를 건넸다. 보통 시시한 이야기였지만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무척 정이 든 팽나무, 가끔 고향에 갈 때마다 따뜻하게 날 반겨주던 그 팽나무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온 나, 그 나무가 있었으면 솔직히 고백할 게 많다. 나는 그 나무를 생각하면서  를 생각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치유의 숲에서 서성이곤 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살랑거린다. 그 틈새로 파고든 햇빛 몇 조각이 춤을 춘다. 햇살은 대기 중에 스며 있는 습기에 부딪혀 찬란하게 산화한다. 먼 기억들이 찰랑거리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젖은 땅 위로 아른거리며 증발하는 수분처럼 희미한 기억의 입자들이 수증기로 피어올라 흩어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유령처럼 숲을 걷는 동안 나는 매일매일 내 몸의 일부분이던 무거운 기억을 휘발시켰다. 그 때문일까. 무거운 몸이 가볍고 기분이 맑고 산뜻하다.

  들꽃이 다소 곳 피어 있다. 들꽃은 약해 보이지만 체질적으로 강하다. 들꽃이 저절로 피는 것처럼 보여도 엄동설한의 긴 겨울을 이겨낸 보이지 않는 뿌리, 줄기, 잎이 없었다면 어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모진 바람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처연히 누워 있는 모습에서 질긴 생명력을 읽는다.

  짙은 정적이 흐르는 숲은 시간이 잠시 정지되어 있다. 울창한 활엽수림이 내 뿜는 싱그러운 향기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새의 날갯짓으로 한나절을 가득 채운다. 배낭에 김밥 한 줄, 오이 한 개, 물 한 통을 넣고 숲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쉼터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 풋풋한 봄나물 같은 남녀대학생들이 시시덕거리며 지나가고, 늙은 부부가 다정히 지나가고 있다. 문득 코로나 이전에 여기서 만난 50대 중년 부부가 생각났다. 나는 그들과 이 자리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남편이 췌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견딜 수 없어 제주에 내려와 2년째 이곳 숲에서 지낸다는 그는 죽음의 그늘을 벗어난 듯 건강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곁을 지키는 아내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숲에서 행복을 되찾은 듯 보였다. 지금 그들은 어디 있을까.

  숲은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이다. 햇볕이 서산으로 기울 무렵, 울창한 숲 여기저기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이 지저귄다. 새들의 노래가 맑고 경쾌하면서도 슬프기도 했다. 서로 무슨 교신이라도 하는 듯 울고 있다. 큰 소리로 우는 놈, 작은 소리로 우는 놈, 자지러지게 우는 놈, 기뻐서 우는 놈, 슬퍼서 우는 놈울지 않은 놈이 없다. 저들이 날 더러 실컷 한번 울어 보라고 토닥인다. 나를 꽃 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엄마의 그을린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숲에서 우는 한 마리 새였다.

  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모든 걸 작게 줄여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에 살아가는 군상들처럼. 푸른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곶자왈 숲길은 기억의 밑바닥에 달라붙은 앙금조차 다 녹일 수 있고, 석양 노을빛 같고, 흰 눈빛 같다. 나는 서산에 걸린 달빛 같은 나이, 봄날 찻잎 새순 같은 생명력이 솟아난다. 하지만 맑은 뒤에는 어둠이 있다.

  이 숲의 나무들도 겨을이 오면 침묵할 것이다. 벌레 소리도 침묵하고 나뭇잎도 침묵한다. 여름내 분별없이 늘어놓았던 헛된 약속들은 모두 낙엽과 함께 떨어뜨리고, 연민과 미련 같은 것들 조용히 떨어 버리고, 나무들도 헐벗은 몸으로 한겨울 찬바람에 몸을 벌벌 떨며 이리저리 휘청거릴 것이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운다. 길게 뻗은 한라산 능선 붉은 노을이 더없이 신비롭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길이 가볍다. 숲이 내 안으로 가만히 걸어 들어온 게다. 내일 또 숨은 사랑을 찾아 동백숲에 갈 것이다.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어둠에 멱살 잡혀가는 나. 짙은 외로움이 온몸을 감싼다. 숙소 침대에 누워 있으니,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하고 차갑고 몽환적인 은회색 창가에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숲의 노래가 그리우면 나는 서슴없이 새들이 노니는 이 숲을 찾아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듣겠다. 나 역시 저 수많은 나무 중 하나일 뿐, 결코 다를 바 없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존재. , 이쯤에서 나도 숲의 한 그루 나무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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