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요 계수나무를 부르면서 자랐다. 지금은 어떤가? 달에 사람이 다녀오면서 계수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강 밀림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불태워 원숭이 두창이 오고, 동굴에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박쥐 서식지가 파괴되어 코로나 병균이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나는 숲으로 갔다. 천천히 살며 오직 삶의 본질만 마주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에서 배우지 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 나는 숲으로 갔다.”라고 했다. 소로가 생각하는 그 숲은 안타깝게도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농촌에 사는 축복 중의 하나는 시공간적 여유다, 하지만 현실은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자연은 정직하다. 자연을 아끼고 베풀면 그만큼 보상해 주고, 훼손하면 반드시 그만큼 갚아 준다. 불과 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주 서남부를 폐허로 만든 종말론적 허리케인 ‘이은 Ian’은 엄청난 강풍과 물 폭탄을 쏟아부어 100여 명이 사망자 했다는 보도는 분명한 인류를 향한 대자연의 경고였다.
어릴 적 농촌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자연에 순응하면서 땀으로 농사짓고 살았다. 뜨거운 여름 일군과 함께 산과 논둑에서 풀을 베어 집 마당 한 구석에 두엄을 만들었다. 가을 벼 추수가 끝나면 경운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 거름을 손수 지게로 져 논밭으로 날랐다. 그때 농민들은 거름이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요즘 농촌에서 유행한다는 자연 친화적 농법이 바로 그 시절에 농사법이다. 독한 농약을 치지 않으니, 가을이 오고 노랗게 벼 이삭이 익으면 온통 메뚜기들 세상이 되었다.
몇 년 전 서울 종로 인사동 고미술 점에서 달구지라고 불리던 옛 우마차 한 쌍과 나무로 깎아 만든 팽이를 사들이어 내 서재에 진열해 두었다. 이 팽이와 바퀴를 볼 때마다 깊은 애정을 느낀다. 어릴 적 여름이면 길 위에서 굴렁쇠를 즐겨 굴렀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집 앞 논에서 팽이를 채로 치며 놀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에 크레용으로 무지개처럼 오색으로 채색해 빠른 속도로 채로 치면 팽이는 흰색에 가까운 아름다운 빛깔의 조화를 보였다. 팽이가 쉼 없이 돌 때 야릇한 전율과 같은 쾌감이 느껴졌었다.
가끔 고향을 찾아 텅 빈 골목길을 걸을 때 허무감마저 들었다.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삶이란 이름의 수레바퀴를 힘겹게 한 바퀴 거의 다 굴러온 지금, 어릴 적 그 시절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골목에서 사람 냄새가 나고 왁자지껄한 웃음꽃이 피던 그 시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외로울 때 고향을 찾는다. 늙은이들만 사는 동네, 오직 적막감만 감돌 뿐이다. 그 옛날 먼동이 터오면 장닭들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새벽을 깨우고 날이 저물면 엄마들의 애들 부르는 소리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어린아이, 얼마나 꾸밈이 없이 순진하고 천진하고 가벼운 존재인가! 오직 가벼운 자만이 웃는다. 그 철없는 웃음을 잃은 골목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팽이를 다시 치고 싶다. 잃어버린 동심에 대한 향수가 그리워진다. 내가 사는 이곳은 소도시 변두리로 10여 년 전 만 해도 울창한 나무숲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은 산허리 넓은 나무숲이 모두 사라지고 밭이 되어 있다. 애초 여긴 길게 눌어진 산 능선을 따라 길게 등산로가 있어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데 그 길마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이처럼 자연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곳곳이 파헤쳐지고 있다. 고향 산천의 푸른 숲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지구가 아프다. 이제는 행동할 때”
그레타 둔베리 Greta Thunberg의 외침이다. 그녀는 스웨덴에서 태어난 19세의 환경운동가이다. 그가 유럽에서 미국 뉴욕 환경 회의 참석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돛이 달린 태양광 보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모습을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줘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산그늘이 설핏 내릴 무렵, 나는 뒷산에 올라 잔디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저 멀리 순천만 갈대밭은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서 삶의 두려움과 호기심, 짜릿함에 두 다리가 후들거리던 떨림을 맛보았다. 어느 날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고, 그것들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인생에 어찌 꽃피고 잎 무성한 여름만 있겠는가. 꽃을 달고 있는 시간은 잠깐이다. 꽃이 핀다고 다 열매를 맺으랴. 절반 이상을 비바람 햇빛에 내어준다. 나무는 잎에 무성할 때는 늘 바람에 시달린다. 마침내 가진 모든 걸 떨구고 빈 가지로 눈보라를 맞을 때가 온다. 하지만 나무는 엄살을 떨지 않고 그 모든 일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숲이 살아야 인간도 살 수 있다. 우리 주변도 무슨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 한다고 무성한 소나무 숲이 듬성듬성 베어지고 있다. 당장 눈앞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존재의 끝과 시작은 원처럼 맞물려 있는데, 시작은 언젠가 끝나지만, 그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빙글빙글 도는 팽이처럼 살수는 없을까?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