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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시간, 소리 없는 바람이다

by 안규수 2023. 12. 25.

                                                     

      시월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다. 며칠 새 하늘색이 바뀌고 바람이 선선해졌다. 가을바람은 구운 감자 냄새를 품는다. 나는 집 근처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뒤적이면서 간간이 떠오르는 착상들을 종이에 끼적인다. 글을 쓰다 생각이 막히고 따분해지면 나는 이 카페에 홀로 앉아 짙은 커피향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 속에 사색의 나래를 펼치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요즘 나는 시간의 흐름에 민감하다. 시간은 나를 그악스럽게 거머쥔 채 흐른다. 굴곡진 삶의 고통마저 부드럽게 껴안고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아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어린 날도 이미 오래전 시간이 안고 떠나가 버렸다. 시간을 건너오는 기억들은 다 향기롭다. 힘들고 모질었던 시간조차 세월의 거름망에서 촘촘히 다 걸러지는지 그리움이라는 아쉬움의 향기만 남아 있다. 한겨울 땅 밑에서 뿌리가 겪어낸 어둠과 추위는 다 걸러 내고 향기만 밀어 올리는 민들레꽃처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역동적이다. 하루 24시간, 일 년이 똑같이 주어진다. 하지만 속도에는 차이가 있다. 젊을 때는 뇌에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많아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나이가 들면 도파민 분비도 줄어들어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반드시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해가 뜨고 지며, 따뜻한 물은 점점 차가워지고, 꺼내 놓은 음식은 부패한다. 시간의 속도는 실제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르게 느낄 뿐이다. 어릴 때 소풍 가기 전날 밤잠을 설치며 밤새 몸을 뒤척인 경험, 또 엄마가 시장에 가신 날 엄마를 기다리는 오후, 그 시간은 무척 더디 흐르고 얼마나 지루했던가.

  며칠 전 일이다. 웰빙 숲길을 걷는데, 저 앞에 허리 굽은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어정어정 걸어오고 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몇 달 전까지 헬스장에서 함께 운동하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치고, 다리가 부러져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말없이 휑한 눈빛으로 내 손을 잡는다. 살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천천히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마음이 울적했다.

   시간의 주인은 항상 시간이다.  잔물결 일렁이던 여울에서 진저리 치며 헤엄쳐 빠져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늘과 굴곡이 많은 생애였다. 직장에서 퇴임을 앞두고 직원의 억대 횡령 사고 터지고 말았다. 오랜 시간 믿고 아끼던 직원의 배신이라 더 아팠다. 나는 관리 책임은 물론 평생을 바쳐 쌓았던 공든 탑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아픔과 자괴감에 몇 날 며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찾아간 곳이 제주였다. 한 달 동안 유랑의 길을 걷었다.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고, 영실 윗세오름과 용눈이오름, 동백숲을 매일 걸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너분숭이를 찾아 수많은 억울한 죽음 앞에서 숙연히 옷깃을 여미었다.

  곶자왈 숲에서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잡초는 잡초대로 그냥 산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지 않으며 산다. 이유가 없는 그냥의 삶.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도 존재 그 자체로 족하고 주어지는 빛과 물에 순응하며 여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붉게 물들고, 겨울이면 잎을 떨군 고고한 삶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꿈의 섬 '이어도'는 너그러움으로 날 품어주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창과에서 송수권 시인을 만나 4년 동안 젊은 날의 꿈을 찾아 헤맸다.

  스위스 장인의 명품 시계처럼 시간이 정교하게 흐르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숨겨진 경이로움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나에게 그 경이로움은 글쓰기이다. 그건 가슴에 맺힌 크고 작은 옹이를 캐내 글 속에 드러내는 일이다. 부끄러운 과거도, 회한의 눈물도, 기쁨의 추억도 모두 옹이로 뭉쳐 있다. 그 옹이를 글로 삭히면서 상상의 늪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한줄 한줄 써 내려간다. 나에게 여행은 즐겁고 가슴설레는 일이다. 여행에서 시간은 날 붙잡지 못한다. 나만이 즐기는 감미로운 맛이 시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아서다. 바람도 표정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건 평생을 나와 함께한 아내의 얼굴이 아닌가 싶다. 아내의 얼굴에 시간의 물결이 잔잔히 아롱져 있었다.

  이제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 듯하니, 앞으로 나아갈 길은 넉넉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걸어가고 싶다. 그 길로 나서는 녹슨 문고리를 나는 잡고 있다. 이제 새로운 출발이다. 두렵지만 담담하게, 이젠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고 내 분수를 알고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시간은 소리 없는 바람이다. 그 시간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정작 시간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가끔 별이 총총했던 어린 날의 밤하늘, 그 시절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는 이미 별이 되었다. 그 스친 시간은 다 사라졌어도 어린 시절 감성은 남아 있다. 그 느낌이 시간이 아닐까.

  사라진 시공은 우주 공간 어디에도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어디론가 진입하면 4차원의 입체 영상으로 과거의 시공을 만나던데, 역시 공상 속 세상에 불과한가? 4차원이 따로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그 기억을 불러와 글을 쓰고 있으니 이 순간이 4차원 입체 영상이란 생각이 든다. 그 기억이 때론 마법의 양탄자처럼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지구의 종말이 오든 말든 시간의 조류 앞에서 내가 쓴 글들이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까, 마음에 세찬 황사 바람이 인다. 남은 해가 짧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는 더욱 절박한 기도가 되어 간다. 나는 갈망한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더 자유를 누리면서 털진달래꽃 향기에 취해 혼자 놀이에 빠져들고 싶다. 어딘가 숨어 있는 나의 어휘를 찾아서. 이게 바람 같은 시간을 속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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