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목성균
자고 나니까 링거액을 주사한 오른팔 손등이 소복하게 부어 있다. 링거액이 샌 모양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멀겋게 부은 아버지의 손, 중풍이 오신 고통스러운 말년의 손을 내가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자지간의 생명의 바통인가. 나는 아버지의 말년, 그 손을 잡고 병고를 위로해 드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손은 퍽 크다. 내 손은 아버지의 손에 비하면 너무 병약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숭배한다. 사랑한다. 어쩌면 지금 내 손이 아버지의 손과 똑같을까? 생명은 닮는다는 뜻 일까?
고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 가정실습 때다. 집에 왔다가 모내기를 돕게 되었다.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했다. 나도 열심히 모를 심었다. 식구들과 일꾼을 몇을 얻어 가지고 모를 심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빗물을 잡아서 논을 삶느라고 고삐에 넓적다리가 스쳐서 피가 날 정도였다.
우리 농사 중 파종의 대미는 천수답 모내기를 끝마치는 것이다. 힘들고 의미 있는 과정이다. 그 날 점심 때,우리는 오동나무 그늘에 점심 들밥을 차려 놓고 먹었다. 신록이 우거진 그늘에서 뻐꾸기가 낭자하게 울었다. 소들은 모를 심느라고 일으켜 놓은 구정물로 엉덩이에 흙덩이가 엉켜 붙은 채 우리 옆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풀을 어귀적어귀적 씹으며 흘금흘금 오월 강산을 건너 다 보고 있었다.
우리 점심 차림은 너무 소박했다. 햇보리반과 묵은 쌀이 반씩 석인 밥에다 상추겉절이, 배추겉절이, 마늘잎을 넣고 조린 꽁치가 전부였다. 그리고 된장, 지금도 눈에 선한 황금색 튀장(토장) 한 탕기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그 날의 점심 맛을 내준 것은 마늘잎 꽁치 조림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맛을 내준 것은 황금색 튀장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상추 이파리 서너 장에 밥을 두어 숟갈 푹 떠서 담고 그 황금색 튀장을 반 숟갈 듬뿍 얹어 꾸기꾸기해서 입에 넣으셨다.
아버지가 상추쌈을 입에 넣고 눈을 끔벅하면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앞산을 건너다보며 볼이 미어지게 상추쌈을 잡숫던 중년 농부의 눈, 그 눈에 뻐꾸기 우는 녹음 방창한 산이 한 귀퉁이씩 그야말로 게 눈 감춰지듯 하는 것이었다. 그 쌈밥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링거에 손등이 퉁퉁히 부은 지금의 내 손과 똑 같았다.
그 후 가끔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하면서 아버지의 손등을 떠올려보곤 했지만, 실상 아버지 손등을 보고 모내기 점심밥 먹던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점심을 먹고 어디론가 가셨던 아버지는 잠시 후 싱싱한 칡잎에 소복하게 산딸기를 따 오셨다. 디저트를 구해 오신 것이다. 쌈밥처럼 두 손으로 잡고 들고 오신 것이다.
“받아라.”
나는 아버지의 손등까지 싸잡아 들었다. 아버지의 손은 육감적이고 내 손은 턱없이 왜소하다. 전혀 닮지 않은 손이 운명의 때에 보니 닮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 있다.
이 글을 읽고/ 안규수
나는 목성균님의 수필을 무척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과거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어서다. 그 과거란 망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인가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글에는 내 어릴 적 뛰어 놀던 동산과 집, 보고 싶고 그리운 부모님 모습이 어렴풋이 아른거린다. 또한 어릴 적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 때론 회한에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있을 때가 많다.
「생명」은 그가 운명하기 며칠 전 병상에서 떨리는 손으로 수첩에 적어 딸에게 건넸다는 이생에서의 마지막작품이다. 평생을 아버지의 권위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오다가다 더러 씨앗도 보며’ 이렇게 쓰고 있다. 일체 작은 집을 차렸다든지, 바람을 피우셨다는 이야기는 그의 수필에서는 찾을 수 없다. 「누비처네」에서 서울에서 돈 벌기는커녕 자갈치 한 두락 쯤 게눈 감추듯 해먹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서下書’가 당도 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를 존경하고 어려워 한 것이다.
"아버지가 상추쌈을 입에 넣고 눈을 끔벅하면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앞산을 건너다보며 볼이 미어지게 상추쌈을 잡숫던 중년 농부의 눈, 그 눈에 뻐꾸기 우는 녹음 방창한 산이 한 귀퉁이씩 그야말로 게 눈 감춰지듯 하는 것이었다. 그 쌈밥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링거에 손등이 퉁퉁히 부은 지금의 내 손과 똑 같았다."
이제 먼 길 떠나야 할 병상에서 아버지의 상추쌈을 드시는 모습을 회상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아버지의 손은 육감적이고 내 손은 턱없이 왜소하다. 전혀 닮지 않은 손이 운명의 때에 보니 닮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큰 손에 비해 작고 왜소하게만 느껴지던 손이 닮아 있단다. 전혀 닮지 않은 손이 운명 때 보니 닮아 있더란다. 그는 그렇게 닮은 손으로 아버지가 가셨던 길을 따라 갔다. 과연 인간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화두를 우리에게 남겨 둔 처연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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