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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영원한 사랑

by 안규수 2024. 7. 30.

                                                                           영원한 사랑

 

 

    지난 6월 초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대형 복부 수술을 받고 16일 만에 퇴원해 해묵은 노트를 뒤적이다가 미국의 기업가 스티브 잡스가 깊어진 병으로 삶이 시시각각 마감을 향하고 있을 때, 그가 남긴 유언을 읽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저는 생명을 연장해 주는 기계의 녹색 빛과 소음을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비로소 저는 깨닫습니다. 제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의 기억들뿐입니다. 사랑만이 진정한 부유함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여러분과 함께하며,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힘과 빛을 줄 것입니다.

사랑은 끝없이 수천 마일을 여행할 수 있고 사랑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랑이 하자는 대로’,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오. 그 모든 것은 멀리 있지 않고 당신의 가슴 속에,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스티브는 이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가 세상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겼고 오늘도 무지개처럼 하늘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라졌기에 그는 자기 삶의 아름다움을 마침내 완성했죠. 한 생애를 마감하면서 그가 남긴 이 글은 작은 조약돌이 되어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파문 위에서 종이배를 탄 듯 조용히 흔들리는 가운데 나는 깨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4년 전 발간한 나의 수필집 중에서 고백이란 작품 속에 내가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이던 내 나이 열여섯 때, 새벽이면 은은히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이끌려 처음으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어느새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입니다.

그동안 삶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 의지가 아닌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 이끌려 지금까지 평온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먼동이 터오는 새벽, 창밖 소나무에 희미한 달빛이 걸려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늙음을 향하는 길이고 늙는다는 것은 곧 완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의 인생은 덜 익은 감처럼 떫음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러움뿐입니다.

스물한 살, 군대에 입대해서 근 1년 만에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되고 15개월 동안 최일선 전투 중대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작전 중 칠흑같이 어두운 정글에서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B40 포탄이 바로 옆에서 터져 선임하사와 병사 한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으니 불가사의한 기적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지 못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잘 산다는 건 삶의 매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입니다. 성숙엔 아픈 체험이 필수입니다. 아파야 의연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아픈 시간을 견뎌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요즘 느낍니다. 그 음미에 쓴맛이 빠져서는 말짱 허사입니다. 쓴맛 없이는 단맛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최고 기쁨은 역시 사람끼리 눈빛과 숨결과 온기를 나누는 데 있습니다. 거기 설령 통증이 따라오더라도!

  우리 집은 원래 단명한 집안입니다. 부모님은 60대 초반에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형은 마흔한 살에 명을 달리했습니다. 형의 마지막 가는 길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형극의 길이었습니다. 쉼 없이 찾아오는 통증은 온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고통을 호소하는 남편을 업어 주고 안아주는 형수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입원 중 의사로부터 암입니다하고 통고를 받는 순간 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죽음이란? 마지막 가는 길이 이리도 힘들어서야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형이 위암 말기에 겪은 극심한 통증은 지금까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태어나 몸이 커지고 세상사는 기술을 익히고 혼인하고 자식 낳고 그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는 일과 그 일상 노동에 따라오는 몇 종류의 쾌감을 맛보다 아프고 병들어 홀로 죽는 것? 그게 전부라면 존엄해야 할 인생이 너무 누추합니다. 나는 분명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을 추구하려고 세상에 왔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정쩡한 인생을 살아온 느낌입니다.

  내일 아침 다시 하루해가 떠 오를 때, 내 마음속 심지에 당겨질 첫 촛불이 감사함의 자각으로 조용히 흔들리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 흔들림으로 여생을 살아가길 원하고 나의 모든 감각이 그곳으로부터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나의 삶은 온전히 거기로 되짚어 가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삶에서 가장 절정이 될 마감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

 

  그 유명한 성서의 사랑에 대한 정의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영원하고 온전하며 믿음 소망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은 무채색의 일상에 빛을 쏟아부어 줍니다. 그건 때로 시간을 초월하면서. 여기서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직선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진정한 시간이란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나는 오늘도 숲길을 걷습니다. 그 길의 끝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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