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쓰다
안규수
봄이 꽃과 새들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낙엽과 풀벌레의 계절이다. 바람에 낙엽이 날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텅 빈 가슴을 울린다. 가을밤 창가에서 귀뚜라미가 울면 한 편의 시를 읽고 싶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지난해 손으로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신선함이라니. 책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좋은 글 읽고 참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인데, 따스한 군고구마를 먹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지만, 굳이 편지를 보낸 그녀의 마음을 아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문학 동호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지난해 말 발간한 동인지에 실린 나의 작품을 읽고 보낸 편지였다. 첫 수필집을 발간하고 전화나 메일로 소감이나 축하 인사를 받은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손 편지는 처음 받아 보았다. 예전엔 누구나 다 연락을 하려면 편지를 썼고,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으면서 손끝이 조금 떨리기도 했다. 돌아가는 내내 뒤를 돌아보고, 마음은 우체통 옆에 파수꾼처럼 밤새워 세워두기도 했다.
고교 시절 친한 친구와 펜팔이 있었다. 이웃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으로 우리는 남들의 눈길이 어려워 만나기보다는 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나보다 문장이 수려하고 매끄러웠다. 그보다 못한 나의 문장에 허기를 느끼고, 그를 따라 하고 싶은 욕심에 형 책상에 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학원사에서 나온 청소년용 문고판이었는데, 겉표지는 노란색이었고 삽화가 들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는 톰 소여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허클베리는 공부 못하고 집은 가난하고 싸움 잘하고 말썽만 부리는 불량청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동경을 실천할 수 있는 결단성과 행동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그만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옛날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그리움이란 언제든 불쑥 솟아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동요 ‘오빠 생각’ 노래나 봄이면 뒷산에 화려하게 핀 진달래꽃, 안개 자욱한 고향 산하가 그리워진다. 그 시절 그때 내가 그립다.
연암의 <고추장의 작은 단지를 보내며>를 읽다가 낱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한글은 ‘수필’인데, 산문인 수필과 한자가 달랐다. 호기심이 발동되어 눈을 책에 붙였다. 수필手筆이다. 이것은 편지든 원고든 자필로 된 것들을 말한다. 수필隨筆 과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언어의 유희랄까.
연암은 <열하일기>를 통해 문학사상 최고 사상가로 수려함, 생각하는 힘, 절제된 언어, 생명력 넘치는 비유, 세상에 대한 시선이 따갑도록 냉철한 문장을 구가했다. <매미 소리가 책 읽는 소리에서>“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처럼 자연과 인간을 동등하게 여기는 연암은 가장 닮고 싶은 멋진 수필가였다.
‘김승옥 문학연구회’에서 올해의 과제로 김승옥 선생님의 작품을 원고지에 필사하기로 해 「무진기행」을 쓰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나온 뒤 원고를 손으로 쓸 일이 없었던 나는, 학창 시절 써 본 뒤 오랜만에 원고지에 펜으로 쓰니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재미가 솔솔 했다. 손으로 쓴 수필이 이리도 행복하다니. 수필의 콩고물. 나도 내 손에까지 묻은 콩고물을 만져보고 비벼보았다. 그뿐만 아니다.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숨은 의도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펜으로 직접 글을 쓰면 치매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一夕二鳥가 아닌가.
숲길에서 나무에 걸려 있는 작은 현수막을 보았다. “도토리는 저의 소중한 식량입니다”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도토리 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다람쥐가 공손하게 말하고, 알뜰하게 저축한다! 말장난이 아니다. 그러니 도토리를 줍던 아줌마들도 앞으로는 함부로 줍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현상을 제대로 본다는 말이다. 익숙한 나머지 눈길조차 주지 않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의 수필도 삶의 관성이나 일반론 같은 일에 거리를 두고, 이처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 한다.
수필은 삶을 조명하는 글이니 바람과 파도의 외침, 땅이 내쉬는 깊은 한숨이다. 그 모든 소리를 함축하여 수필로 빚어낸다. 어쩌면 수필을 쓴다는 건 지난날의 고통과 불행을 다시 소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걸 함축된 언어와 이미지로 녹여 낸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수필은 사물과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원고지 15매 내외의 짧은 글이라고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수필은 언어의 춤이고, 사유의 무늬이며, 생명의 약동이다. 말과 언어는 그걸 쓰는 자의 인격과 성정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글 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셀 수 없이 수많은 밤 고독을 집약하고, 살아온 삶을 추억을 회상하는 일은 여생을 더욱 보람되게 보낼 수 있는 밑거름이라 생각한다. 수필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가 아닐까. 내가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나’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다.
겨울은 온통 흰색과 검정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다. 겨울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다. 싸락눈이 가랑잎에 내리는 소리, 첫눈을 밟고 오는 여인의 발걸음 소리. 이제 이런 소리가 그립다. 돌이킬 수 없는 유년의 강물처럼, 떠나버린 옛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를 수필에 무채색으로 그려서 넣고 싶다.
나의 푸른 인생은 어느새 가을의 단풍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 인생무상을 절실히 느끼면서, 내가 수필을 쓰는 한 나는 젊은 영혼이다.
나는 왜 쓰는가? 흔들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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