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허기지다」 는 시인 박형준의 에세이 제목이다. 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이 눈물 나게 하는 책이다. 섣달그믐날 밤 나는 세월의 무상에 허기져 있어 그 형용사가 가슴에 박혀왔다. 시간에, 글에, 사람에 허기져 있었다. 그러나 ‘허기지다’는 ‘없다’와 다르다. 있는데 볼 수 없는 눈 뜬 봉사의 시선처럼 자신이 너무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미명 시간, 서재에 홀로 앉아 곧 떠오를 눈 부신 태양을 상상하며 이 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했다. 한 해를 드디어 마무리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어떤 아쉬움, 거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은 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침 일찍 일 년을 버틸 화두를 찾아 나섰다. ‘묵언의 길’이라 명명된 구례 천은사 둘레길. 걷다가 요사채 입구에 걸려 있는 족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니 ‘불언사무수不言似無愁’ 라는 글이 눈에 들었다. ‘말을 안 하면 근심이 없다’라고 설說하고 있다. 그렇다. 나에게 맞는 말이다.
산길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고 숲도 새소리도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천천히 걷는다. 나무들을 깨울까, 봐 두렵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가고 싶을 때 간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숲에서 풍기는 청량감이 코끝을 스친다. 솔숲 아름다운 풍경이 새로운 모습으로 산뜻하게 다가온다.
아득히 먼 옛날, 추억이 담긴 중학교 수학여행 길을 나는 지금 걷고 있다. 화엄사 사자 석탑 바로 옆 요사채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노고단으로 올라가 이 계곡으로 내려왔다. 하루가 족히 걸리는 험준한 산길이었다. 그때 이 계곡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우람한 소나무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후 솔숲은 1960년 중반 천은사 주지의 사욕으로 모조리 벌채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이 일대가 벌거숭이 산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에 굴하지 않은 자연의 자생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 사라진 소나무가 60여 년의 세월을 이겨 내고 어느새 내 몸통만큼 자라서 계곡을 가득 채우고 그 옛 풍경을 재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소년 시절 잃어버린 꿈을 찾은 듯 기쁜 마음에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 솔숲길을 걸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이 숲도 변하고, 나도 변해 있다. 지난해와 올해 사이에 선을 그어 시간을 분절시키는 것은 인위적인 일이고, 사실 어제도, 오늘도, 그저 쇠털 같은 많은 날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지만 ‘설’은 인위적인 분절이 ‘시작’과 ‘끝’을 만든다. 설날 아침 엄마가 손수 만든 새 옷을 입고 연 날리던 시절이 언제였든가.
새해 나의 목표는 여행, 산책, 독서다. 이는 ‘행복의 묘약’이다. 여행과 산책은 취미 생활이 아니라 삶의 방편이다. 건강한 생활 습관,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나는 숲길을 자주 걷는다. 나만의 꿈길이다. 꿈은 삶을 견인하는 원동력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 꿈이 있기에 녹록지 않은 현실의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지난해 가을밤, 제주 중문 색달해변 벤치에 앉아 바다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편했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달빛이 바다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다.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바라보니, 그 별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인다. 능선 위의 달이 크레파스에 그려 놓은 듯 크고 밝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있는 듯 없다. 없다는 말이 너무 시리고, 아프다. 예순다섯의 엄마가 먼 길 떠나는 날 밤 별빛을 닮았다.
생각은 항상 어디에든 가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휘둘리며 후회와 분노로 다시금 상처받기도 한다. 누군가 읊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란 시구가 후회스러운 지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한다. 자책, 회한, 부끄러움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내 존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어느덧 고희古稀를 넘어서니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는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실감 난다.
모든 건 흐르거나 떠나갔다. 아무것도 잡을 게 없다.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다.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다. 막막하다. 죽을 듯 침잠한다. 죽을 듯 아프다. 세월이 흐르니 지금 내 곁에 남은 건 나의 그림자뿐이다. 지나간 추억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것은 잔인하다. 나는 지쳐 있고 나의 정신은 그 불꽃이 잦아드는 듯하다. 무대는 그대로인데 등장인물만 바뀌는, 결코 재등장은 허락되지 않는 인생극장.
그래도 나는 땀과 눈물을 아끼지 않았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맡겨진 배역을 열심히 해냈다. 어이없는 실수에 자책하기도 하고 공허한 박수에 우쭐대기도 하면서, 때로는 새벽 빗물 소리에 뒤척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 부는 벼랑 끝에 서보기도 했다. 교회 차디찬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왜 울었을까. 내 무의식에 숨어 있던 그늘의 아픔이 부풀며 우러났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서재에서 큰아들이 선물한 김응교의 책 ‘그늘’을 읽는다. 독서는 마음으로 곰 삭여서 읽는 마음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과거의 텍스트로 들어가는 하나의 일탈이기에 나는 즐겁다.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아득히 끝이 보이는 그 길. 그 길은 걸어왔던 길이 아니고 낯설고 새로운 길이다. 과거는 현재에 이르러 무상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현재도 미래의 어느 때에는 무상이란 단어를 묘비처럼 남길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없다. 시간을 통해 서로의 빈칸을 오갈 뿐이다. 세월에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이 인생이다. 묵상은 자기를 찾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빛날 것, 가장 강인한 자아로 탈바꿈시키는 운동. 그것은 ‘나’를 찾는 경건한 기도다. 무한한 신의 사랑, 이 사랑보다 더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