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드디어 화르르 꽃망울을 열었다. 이렇게 봄꽃 향기에 흠뻑 빠져 본 적이 내 일찍이 없었던 같다. 3월이 가기 전에 봄꽃이 춤추는 꽃밭에 가야 할 터인데 마음이 바빠졌다. 선암사 600살 백매 홍매, 구례화엄사 흑매, 낙안금둔사 납매, 섬진강가 벗 꽃등 가 봐야 할 곳이 너무 많다.
봄꽃은 뭐니 해도 매화가 일품이다. 그 매화 중에서도 선암사 무우전 매와 화엄사 흑매가 으뜸이다. 허나 고매는 산 속 깊은 절집에 있는 탓에 개화가 늦다. 아마도 넉넉히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구례 산동 산수유 꽃밭에 들었다. 꽃밭은 온통 노란색 물결이다. 복숭아꽃이 산수유 꽃으로 바뀌었을 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산동 계척마을에는 산수유 시목이 있다. 지금부터 천 년 전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오며 묘목을 가져와 심었단다. 그리고 이 일대가 산수유 군락지가 조성 되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봄이면 지금 같은 산수유 꽃이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고.
1597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관한 일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혈혈단신 한양을 출발해 박제를 넘어 계척마을에 당도했다.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이었으리라. 동내 사람들은 정성으로 끓인 산수유차를 대접했고 이어 장군은 힘을 얻어 나라를 구했다는 것이다.
선인들은 사시사철 피는 꽃을 결코 허투루 보지 않았다. 꽃을 보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깨달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그리고 시나 그림의 주제로 삼아 풍류를 즐겼다.
봄이 뻐근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천지가 텅 빈 충만이다. 산수유 향에 혈압이 오른다.
꽃향기가 꼬드기고 부추기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다 다음 날 벗 꽃이 보고 싶어 차를 섬진강가로 내 몰았다. 벌써 마음은 꽃비에 가있다. 연분홍 치마는 민망스럽다. 알뜰한 맹세도 고릿적 애기다. 그래도 어쩌느냐. 저 탐스런 꽃숭어리만 보면 가슴이 뻐근해 오니. 아니나 다를까 벗 꽃 터널을 지날 때 꽃비가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꽃비가 시야를 가린다. 보도위에 널브러진 꽃잎이 봄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린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선다.
찬란한 봄은 하염없이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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