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 내일의 업무를 마치면 긴 구정 연휴로 들어가게 되네요.
저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조용히 지낼 계획인데요,
하루중 조용한 시간을 내 말씀으로 여행도 다녀올 참입니다. ^0^
지난 구정에는 신약 서신서로 다녀 왔는 데요,
금년 구정에는 구약 선지서 로 다녀올까 계획중입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김선교님의 <믿음은 분투다>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체를 사랑하지 못함에 대하여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미움, 시기, 질투 같은 지체를 향한 불순한 마음 자체로 지체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낙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지체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지체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주셨다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우리가 여전히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감정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지체는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의지의 결정이 사랑을 확증할 수 있다.
이 말은 감정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감정과 상관없이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는 의지적인 결단을 하셨다.
그 의지적인 결정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감정적으로 그 지체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이며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론난 자에게는 대상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부어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에 근거한 사랑이 굉장히 효과적일 수도 있지만 그 효력이 일시적이다.
내 감정이 받혀줄 때만 가능한 사랑인 것이다. 주님은 그런 일시적인 감정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어떠하든지 나를 어렵게 하든,
상처를 주든, 보기에 좋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지체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차별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죄인을 사랑하셨다.
우리는 지체를 사랑할 때에 우리의 감정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동일한 원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취하는 태도와 동일한 태도이다.
나에게 맞지 않고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죄인이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감정의 반응 때문에 놓치지 말자.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편파적이고
나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고 멀리하라고 한다.
그런 나의 감정을 부인하고 의지를 써서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사랑의 대상인 모든 지체에게 동일한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지체를 향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하면 내 안에서 시기와 미움이 일어나도
결국 사랑은 그를 사랑으로써 섬기는 가장 낮은 자리로 가게 할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로마서 12장 10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에베소서 4장 32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 요한일서 3장 14절
주님,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정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던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키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남들보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진심을 아셨기에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당신이 서 있는 곳은 뽕나무 위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낮은곳입니까?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미국 재무부에는‘양심을 위한 기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그것을 갚을 방법이 없어진 사람들이 보내는 기금인데,
1800년대에 이 기금이 생긴 뒤 200년이 넘게 꾸준히 모인 돈은 3백만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보통 이 기금을 내는 사람들은 간단한 사연이 적힌 쪽지를 함께 보내는데,
처음으로 기금을 낸 사람은“이제야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다. ”라는 내용과 10달러의 돈을 보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2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을 낸 적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단체로 세금을 지금까지 속였었다며 남은 금액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같은 자리에서 들었던 성도들로“나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양심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돈을 보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불의하게 축적한 재물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믿음과 양심의 사이에서 갈등하지 말고 언제나 성경에서 해답을 찾으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양심을 속임으로 주님을 기만하는 성도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오늘 해결할 수 있는 양심의 거리끼는 일들은 오늘 해결하십시오.<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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