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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돌아오지 못한 돈 / 정성화

by 안규수 2016. 5. 8.

길을 가다가 갑자기 내 앞에 돈벼락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까. 허겁지겁 그 돈들을 주워 담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대구 돈벼락사건'이다. 

한 청년이 왕복 8차로 횡단보도에서 5만 원권 지폐 160장, 즉 800만 원을 허공에 뿌렸고 부근에 있던 운전자와 행인들이 순식간에 주워 갔다. 사실 그 돈은 한 가족의 아픔이 들어있는 돈이었다. 평생 고물 수집으로 한푼 두푼 저축해 온 할아버지가 정신질환을 앓는 손자에게 유산으로 남긴 돈의 일부였다. 그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며칠 만에 285만 원이 경찰서로 되돌아왔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픈 사연 담은 '대구 돈벼락 사건'
'돌아오지 못한 사정이 있겠지요'  
500만 원 기부자의 속깊은 메모  

친구에게 당한 보증 사기  
간절히 돌려받고 싶던 그 돈도  
이제 생각하니 사정이 있었을 듯 

그쯤에서 일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한 남자가 신문사 편집국을 찾아와 봉투 하나를 건네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봉투 안에는 500만 원과 이런 메모가 들어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돈도 사정이 있겠지요. 그 돈으로 생각하시고 사용해 주세요.' 

사정은 딱하지만 더는 어쩔 수 없다며 우리 모두가 한쪽으로 밀쳐 둔 아픔을, 익명의 한 사람이 다시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메모지는 다이어리에서 한 장 떼어 낸 것으로 왼쪽 상단에 2009년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6년 전 것을 아직 쓰고 있는 걸로 보아 평소에 근검절약하는 사람으로 짐작된다. 짧은 메모였지만 주운 돈을 돌려주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느 재벌의 수재의연금 1억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  

'돌아오지 못한 돈.' 그것이 얼마나 아픈 말인지 사람들이 알까. 나에게도 간절하게 돌려받고 싶은 돈이 있었다. 내가 객지에서 직장생활 하는 틈을 타서 내 친구가 우리 어머니에게 급속도로 다정하게 굴었다.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비싼 소고기나 과일상자를 몇 차례 사들고 왔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해 당장 큰 수술을 받아야 하니, 돈을 빌릴 만한 데를 소개해 달라"고 하더란다. 그동안 받은 선물 때문에 어머니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 길로 사채놀이 하는 친척집에 그녀를 데려갔다. 그날 그녀가 얼마를 빌려갔는지 정확한 액수도 모른 채 어머니는 보증인 자리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 달라며 어머니 손에 10만 원을 쥐여 주고 가더란다. 내가 모든 걸 알게 된 것은 그녀 가족이 야반도주한 뒤였다. 그녀의 집을 찾아갔더니 이미 여러 채권자가 다녀갔는지 살림살이가 다 부서져 있었고, 주인을 따라가지 못한 강아지만 제 집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두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그녀를 잡으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그 돈의 반이라도, 아니 그것의 절반이라도 제발 돌려 달라고 사정할 참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 만에 우리는 살던 집을 처분하여 그 돈을 변제했고 변두리 전셋집을 얻어 이사했다.  

나로 인해 가족이 고통 받는 걸 보면서, 그녀를 붙잡으면 단번에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우정은 물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저버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사람'이 무서웠다.  

그때 우리 가족은 휘청거리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잡고 함께 걸으니 발은 저절로 따라왔다. 가족의 힘이란 서로 잡고 있는 손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삶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도 있더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익명의 기부를 한 그의 메모를 보던 날, 어쩌면 그때 그녀에게도 참으로 긴박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오래된 멍 하나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그날 저녁은 겨울인데도 이상하게 바람이 훈훈했다. 왠지 봄이 일찍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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