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8 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 - 이생진 - 아내는 76이고 나는 80 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 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있습니다. 다가올 시간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탓에 낯설지 않은 미래를.. 2022. 11. 22. 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나민애 문학평론가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미산이 가려 있기 때문이리 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잎새에 가려 있기 때문이리 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리 아 두고 온 얼굴을 찾아 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 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리에 담고 담는 반복이리. ―최원규(1933∼) ‘해가 좋아, 달이 좋아?’ 만약 시인에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이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에 필적할 만큼 난제다. 어려우니까 다수결에 따라보자. 정확한 수치를 헤아린 사람은 없지만, 우리나라 시에는 유독 달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니 나는 시인한테는 해보다 달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달은 해와 다르게 눈에 담을 수 있다. 눈에 담으면 마.. 2022. 6. 11. 서시(序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1952~)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 2022. 5. 20. 봄 지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아도 지난 계절은 돌아오고 시든 청춘은 다시 피지 않아도 시든 꽃은 다시 피고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도 빈 술잔은 채워지고 -주병권 (1962~) /일러스트=박상훈 짧지만 폐부를 찌르는 시. 다시 돌아오는 계절과 돌아오지 않는 시절의 대비, 다시 피지 않는 청춘의 비유도 훌륭하다. 내용도 좋지만 형식미도 갖추어 더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 두 행이 한 연을 이루는데, 모두 두운을 주었고 서로 상반되는 서술어를 붙였다. ‘지난’으로 시작한 1연, ‘시든’이 반복되는 2연, ‘빈’으로 시작한 3연. 빈자리를 빈 술잔이 메울 수 있을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어 더욱 커지는 당신의 빈자리. 봄꽃들을 보기가 괴롭다. 행의 끝에 ‘도’와 ‘고’가 엇갈려 반복되고 세 연이 모두 ‘고’로 끝난.. 2022. 5. 20. 이전 1 2 3 4 5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