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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댓꽃 피는 마을'을 읽고/ 박 춘

by 안규수 2017. 5. 11.

우리는 냉정함을 표현하거나 박정함과 서운한 감정을 표현할 때, 돌같이 무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신념을 말할 때는 금강석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신체의 강건함을 의미할 때는 무쇠를 빌려 무쇠팔. 무쇠 같은 건각이라고 말한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우리는 변할 수 없는 무의지의 존재인 무생물을 빌려 의지화 시키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질은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본래의 성질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변화의 역동성을 타고 난 탓에 변화하지 않아야하는 그 무엇인가에 허기를 느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댓꽃 피는 마을’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남도의 마을들은 반드시랄 정도로 크든 작든 대나무 밭이 있다. 그곳에서 낳고 자란 아이들은 ‘가는 빗방울이 댓잎을 간질이는 소리. 댓잎이 댓잎을 서로 부르고 비비고 밀어내는 소리. 늙은 대나무가 옹이진 뿌리를 뒤틀며 부드러운 땅위로 기어오르는 소리들.’을 들으며 자란다.

 한가위 밝음과는 품성이 다른 입동의 달은, 빛을 안으로 갈무리한다. 그 은미하고 내밀한 달빛과 겨울을 재촉하는 밤바람에 댓잎끼리 서걱대는 소리는 그대로 시의 언어다. 소년은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들으며 자란다.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우리들의 공부방이었던 뒷골방은 쥐똥과 먼지로 가득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벽지엔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다. 눈 내리던 밤, 호롱불 아래서 동화책을 읽으며 꿈을 꾸던 소년들은 이제 다시는 이곳에 모일 수가 없다. 한때 60여 호가 넘어 활기차던 마을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지 오래다. 수호신처럼 마을을 감싸온 대나무 숲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꽃이 핀 대나무가 모두 말라 죽으면 그 자리에서 작은 죽순이 올라오는데 그 어린 대(竹)도 모습을 갖추기 전에 다시 꽃이 피고 죽기를 두 번, 세 번 거듭하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고 한다. 내 고향도 쇠락의 길 끝자락까지 다다르면 다시 회생할 수 있을까.’ -본문에서 가져옴-

 

사람들이 자신과는 무관한 듯 간주하는 시간의 제한성은 생명체의 한계다. 생명체가 지닌 시간성은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선택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냉엄한 운명이다. 그러나 “워매. 이거 누구다냐. 밥은 묵었냐?” 고향 백동할머니의 이 다정한 말은 시간성의 한계 너머에 있다. 고향과 고향사람은 항상 변하지 않는 육화된 형상으로 시간성 너머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고향을 이룬 모든 것은 생명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고향 역시 변화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마 이 간극이 귀향의 눈시울을 이루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현재’라는 존재라고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는 말했다. 살아온 생의 전체의 무게를 현재의 시간에 담고 있으면서 또 그것을 내일로 가져갈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고향의 변화, 진실로 그 엄숙한 시간성과 되돌릴 수 없는 방향성 앞에서, 경건해지고 착해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맑게 고인 그 무엇이 되어 옛날 그 옛날의 시어(詩語)에 목이 메이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 너머에 고향이 있고 수필을 쓰는 마음이 있다. 고향과 댓꽃을 빌어 생명체의 변화해야하는 숙명과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것들을 그려냈다.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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