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한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진다’라고 표현했다. 한 노인이 평생을 쌓아올린 덕업과 지혜가 만 권의 도서에 비견할 만하다, 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에게 한 노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그의 죽음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내 고향 마을의 노인들도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건 그분들의 주름진 얼굴과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거친 손매듭뿐이다.
작가 안규수가 어렸을 때, 그래서 그분들이 그만큼 젊었을 무렵에 마을은 번다했고 대숲은 울울창창했고 논밭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왁자했다. 이제 그 고향마을을 다시 찾아가 보면 마을은 쇠락하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뜸하고 대밭은 황폐해졌다. 말하자면 한 노인과 함께 한 무리의 대밭과 한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대밭과 마을이 왜 없겠는가마는 그의 마음속의 대밭과 그 마을은 노인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어려서 댓꽃은 백년에 한 번 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 백년은 얼마나 아득한 세월이었겠는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백년도 촌음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며 백년에 한 번 핀다는 댓꽃도 우담바라와 같은 전설이나 신화의 꽃이 아니라 우리의 수명과 얼추 일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 인간의 생애는 푸른 대밭의 영고성쇠와 같은 신비일 수 있으며 한 마을의 애환이 송두리째 담겨있는 전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노인과 함께 한 마을이 떠난 것이다. 그는 이 위대하고도 엄연한 삶의 진실을 그의 「댓꽃 피는 마을」 속에서 애틋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에겐 가장 신비하고 은밀한 놀이터였던 대밭은 누구의 대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대밭이어야 했다. 그러나 대밭의 주인은 그가 대밭에 드는 것을 몹시도 마땅찮아했다. 그는 비내리는 날이면 일쑤 대숲으로 숨어들었다. 주인에게 들킬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물에 젖은 생쥐꼴로 흠뻑 젖은 채 대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 보면, 빗방울을 뒤집어 쓴 댓잎도 마냥 즐거운 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빗물을 쏟아 붇곤 했다. (....) 이윽고 내가 나고 자란 옛집으로 들어섰다. 가끔 들러 잡초를 뽑고 청소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이라 세월에 바래고 풍우에 씻겨 퇴락한 모습이다. 그래도 뒤란, 울타리대나무에 바람이 일고 댓잎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날 반기는 것 같다. 어느새 날이 개어 햇볕이 내리 쬔다. 저 따사로운 햇살… 어머니 품에 든 듯 안온하다.
대나무에 대한 일체의 상투적 표현(cliche)이 없다. 절개니 올곧음이니 텅 비어있음이니 같은 으레 등장하는 수식어들이 없으니 오히려 글이 담담하게 마음을 적신다. 대나무꽃이 피어나고 노인들이 사라지고 옛집들이 쇠락해가는 정경이 어린 시절의 풋풋한 추억과 함께 어우러져 한 세대가 떠나가는 쓸쓸함을 심도 있게 묘사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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