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요 며칠 호치민은 지난 토요일 몇 차례의 비가 다녀간 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진 듯 합니다. ^0^
우리가 영원의 가치를 안다고 하면,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영원을 소유하겠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린 그 영원의 가치에 대한 안목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이유이겠지요. "주님 저를 긍휼이 여겨 주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은 김용의 선교사님의 <복음을 영화롭게 하라>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전심이란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한, 말 그대로 100퍼센트의 마음이다.
반면에 진심은 마음의 깊이는 있으나 전심이 아닌 것을 표현했다. 무슨 말인가?
사람은 진심을 담아 골똘히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심은 그것만 진심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역시 진심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서 노래방에 가서 진심으로 노래할 수 있다.
노름방에 가서 5박6일 동안 눈알이 빨개지도록 진심으로 도박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매사에 진심일 수 있다. 그러나 전심은 그와는 다른 개념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 관원의 예를 들어보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구도자적인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그에게 계명을 알고 있으니 그 계명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계명을 모두 지켜왔다고 예수님께 대답했다.
그가 진심으로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왔다고 하는 말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첫째, 그가 부자다. 그 시대의 부자는 오늘날의 벼락부자가 아니라 세습부자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는 젊은이인데 관원이 되었다. 그 말은 귀족 집안이라는 것이다.
아뿔싸! 게다가 모태신앙이다.
대대로 모태신앙에 권력도 있고 돈도 있는 혈기방장한 청년이 어려서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켰다니,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는 가장 모범적이고 열정적인 청년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을 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 말은 99퍼센트 다 되었으니 1퍼센트만 더하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역해보면 이런 말씀이다.
“너는 진심으로 영생을 구하는구나(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나와 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너에게는 영생에 대한 진심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은 그가 잘못된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지적이다.
그에게 다른 진심이 더 있다는 것이다. 아찔한 말씀이다.
사람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 거룩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면서 거룩과 정반대되는 정욕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 두 개념이 서로 상충되는데도 우리는 두 진심 중 어느 하나도 절대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거룩도 영생도 꼭 취하고 싶고, 재밌고 끔찍한 것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진심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모순이 되는 진심을 절대 충돌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뒤집어지고 변화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자기 편리한 대로 인식한다.
“너 구원 받았어?”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열정과 거룩에 대한 사모함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그 진심이 있다고 반응한다.
또 다른 순간 정욕이 자기를 유혹해오면 거룩에 대한 사모함 따위 싹 잊고 이편에서 다시 진심으로 진지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두 가지 진심이 존재할 때 반드시 기억하라.
두 가지 다 똑같은 진심이란 없다. 그중에 하나는 반드시 전심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엎어지는 쪽, 변명의 여지없이 그것이 바로 ‘나’다.
이것이 바로 부자 관원의 예다.
“너에게 영생을 구하는 것만이 진심이 아니다. 네게 두 가지 진심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반드시 전심이다.
너, 돈이냐? 영생이냐? 영생은 네 앞에 가까이 있다. 돈인지 영생인지 선택해라.”
이 청년의 선택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쉬운 인물을 한 사람 뽑으라면 바로 이 부자 관원일 것이다.
평생을 매달렸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 미끌어졌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런데 정작 부자 관원은 자기의 실체를 전혀 몰랐다.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죄인들의 특성이다.
그러나 “돈이냐, 영생이냐?”라는 주님의 도전에 부딪치자마자 그의 안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가 재물이 많았으니 갈등하는 것은 맞다. 문제는 그가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선택하는 그곳에
당신의 마음이 있다
여기서 그의 전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돈과 권력과 젊음의 유혹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며 지금까지 영생을 추구해왔는데,
거의 다 왔는데, 이제 그 영생을 놓치지 않고 붙잡기만 하면 되겠는데 격렬한 고민 끝에 재물을 놓으려고 보니
그는 그제야 자신의 전심이 재물에 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손 모두 재물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영생을 붙잡을 손이 없고,
붙잡은 재물을 놓으려니 자신의 전심이 거기 있기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여기에도 진심,
저기에도 진심일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돈을 선택한 다음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고 율법을 어긴 적이 없는 이 모범적인 청년에게 누가 천국이 멀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진심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 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은혜받는다고 감동받지 말라.
반드시 테스트해볼 것이 있다. 그 사람을 십자가로 끌고 가는 것이다.
복음 앞으로 끌고 가면 절대 그 내면을 숨길 수 없다.
부자 관원이 돌아가자 주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처럼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도다.”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 가기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낙담한 한 제자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주님은 또 예외 없이 정확히 답해주셨다. 진리는 애매모호한 법이 없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6
사람이 바뀌고 복음이 말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사람의 말에 설득당하거나
사람이 열심을 다하는 따위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이다.
즉 죄에 속했던 자가 천국의 수준으로 바뀌는 이 일은 인간 최선의 산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전심이 아닌 진심만의 변화는 변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 내면의 중심이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한 변한 것이 아니다. 변화의 초점은 정확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며 인간의 존재적 변화다. 그 중심이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다.
복음을 영화롭게 하라.김용의 / 규장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장 17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빌립보서 1장 20, 21절
주님, 저는 거룩한 영생도 취하고 싶어 했고, 세상의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편리에 따라 이쪽을 선택하기도 하고 저쪽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부자 청년의 모습이 바로 저였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님을 향한 전심이 제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고후 2: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스페인의 전설적인 성군 아라곤 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시장으로 시찰을 나갔습니다.
마침 한 상인이 진귀한 보석들을 많이 가져와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구경을 하다가 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상인이 쫓아와 비싼 다이아몬드가 없어졌다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과 신하가 있었기에 다른 손님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상인의 말을 들은 왕은 다시 신하들을 데리고 상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소금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순서대로 이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가 한 번씩 뺍시다. 우선 나부터 하지.”
모든 신하들이 손을 넣었다 뺀 뒤 자루를 뒤집어 보니 상인이 잃어버린 그 다이아몬드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았으나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기회를 주고 싶어 소금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용서하고 배려하는 일이 더욱 지혜로운 일입니다.
나에게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또 배려할 줄 아는 커다란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배려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누군가 혐의가 있을 때 아라곤 왕처럼 지혜롭게 처리합시다. <낌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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