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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나의 문학적 딜레머/정승윤

by 안규수 2020. 12. 6.

나의 문학적 딜레머/ 정승윤

 


처음 ‘에세이스트’사의 가을 세미나에 강의를 요청받았을 때 저의 대답은 완강한 거절이었습니다. 격에 맞지 않은 짓을 하면 반드시 낭패를 본다, 라는 것이 저의 신조였거든요. 그러나 저의 거절 정도는 완곡한 수락 정도로 여기시고 대뜸 강의의 제목을 물어오셨습니다. 그래서 거절 못하는 유약한 성격 때문에 딜레마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강의 제목이 ‘나의 문학적 딜레마’가 되고 말았더라고요.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글쓰기는 물론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러나 글쓰기의 상당 부분은 스스로 체득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꼭 강의가 아니라도 신앙 간증이나 신앙 체험처럼 저의 문학적 간증이나 체험이 여러분에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동료 문인의, 또는 한참 뒤진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분이 문학을 체득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가는데 다른 문학 모임이었어요. 이야기하시는데 얼핏 들으니까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글이 꼭 자폐아 글 같더라.” 그런 소리가 얼핏 들리더라고요. 탁 들으면 느낌 있잖아요. ‘아, 내 이야기하는구나.’ 그래서 들어봤더니 내 수필에 우산이라는 수필이 있어요. 우산이라는 수필에 관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내가 안 듣는 걸로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수필의 내용이 뭐냐면 퇴직하고 집안으로 숨어서 제가 사는 거예요. 세상이 너무 두렵고 힘들어서 지방에 내려가서 혼자 숨어 사는 거예요. 숨어 사는데 비가 왔어요. 비가 꼭 나를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산을 쓰고 나갔어요. 우산 속이 조그만데 내 하나의 세상이더라고요.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정겹고 우산 너머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세상을 우산 아래에서 바라본 거예요. 그리고 다시 돌아왔어요. 우산을 접어서 신발장에 넣어놓고 다시 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혼자가 된 거에요. 신발장 한쪽에 있는 우산,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내 의식의 한편에 떨어지는 고독의 빗소리, 그 고독의 빗소리가 그립다. 뭐 이런 식의 글이었거든요. 거의 자폐아 수준이죠.


그런데 또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 수필 참 좋았다.”
아! 자폐아의 글도 어떤 분에게는 호소력이 있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내 글이 여러분 내부에 숨어있는 자폐아에게 호소했던 것 같아요. 아마 여러분 내부에도 다 나 같은 자폐아가 하나씩 숨어있지 않나, 상처 입은 자폐아들이. 그분들에게 내 글이 어떤 면에서는 호소력이 있을 수가 있다. 내 이야기가 내면의 세계를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강연에 대해 요청을 받았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한 수필지로부터 ‘내 작품을 말한다’라는 꼭지에 내 작품이 쓰여진 동기, 배경,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 등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작품을 내가 해석해본 적도 없고 반성해본 적도 없고 내 작품이 어떤 문학적인 성과가 있었나,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고 오로지 나는 내 글을 써서 내 글로 이야기하겠다, 이런 생각만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내 글이 과연 객관적으로 어떠한 가치가 있고 어떠한 문학적인 위치에 와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 한 번도 반성해본 적도 없고 저 스스로 비판해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도저히 글을 못 쓰겠더라구요. 내가 내 글을 썼으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스스로 그때부터 내 글이 과연 어떤 글인가, 철저히 나 스스로 비판도 해보고 반성도 해보고 그러면서 이 강연도 함께 준비하게 된 거죠.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다른 분들이 그동안 나의 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는가 그것을 돌이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내가 가장 내 글에 대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가, 거기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 인생에 대한 반성까지 되더라고요.


제가 글을 쓰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뭐냐면 수필 작품이 시 같다, 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이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계통의 작품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다른 작품보다도. 그럼 이게 도대체 뭐냐, 시 같다는 게 뭐냐, 시적인 아름다움이란 뭐냐,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시 같다는 말은 칭찬일 수도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시를 못 쓰니까 네가 산문을 쓰는 거 아니냐, 이런 소리로도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부터 과연 내 작품이 수필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지난날을 돌이켜 봤죠.


젊어서는 제가 시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시를 써왔고 백여 편의 시를 썼어요.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서 시집을 한번 내보려고 백여 편의 시를 읽었어요. 그때 저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역시 나는 시를 써선 안 되겠다, 나는 시인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대체 나는 이렇게 시를 좋아하고 시인들을 경외하고 시에서 많은 문학적인 감수성을 얻었고 배웠는데 왜 정작 나는 시를 못 쓰는가, 절망감이 밀어닥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면 시에서는 왜 내가 인정을 못 받았는데 산문에서는, 수필에서는 왜 인정을 받는 걸까? 그게 뭘까? 시를 쓰면 왜 사람들이 시가 너무 산문적이다는 말을 할까? 산문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왜 수필을 쓰면 시 같다, 시적이다 이런 평가를 들을까?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거예요. 제가 시인도 아니고 수필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이브리드도 아니고, 도대체 내 정체가 뭐냐.


제가 시를 결정적으로 쓰게 되지 못한 것은, 시정신에 의존하면서도 제 글에 산문성이 있어서 시로서 성공을 못한 거예요. 시에 있어서 산문성이라는 게 뭐냐, 이렇게 스스로 자문을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제가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제 문학관일 수도 있겠죠.


이게 제 개인적인 문학관이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 이야기지.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다. 너무 주관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마는 제 이야기가 아무 설득력이 없더라도 ‘저 사람 개인적인 편향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들어주시면 저와 제 문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실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제 글을 읽으면서 내 글에 있는 ‘산문성’이라는 게 뭐냐 이걸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왜 나는 시를 못 쓰느냐 이런 생각도 했는데 첫째는 시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비유 아니에요? 비유인데 제 비유가 너무 범박하다는 거예요. 제 글에 동원된 비유가 참신하지도 않고 기발하지도 않고 평범하고 범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나 스스로가 너무 경직이 돼버려요. 시는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위대하게 써야 된다, 시대정신이 반영돼야 되고 시에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고 비유 하나를 하더라도 지금까지 없었던 참신한 언어로 빅뱅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중압감 때문에 시를 못 쓰는 거예요. 너무 경직돼버립니다. 지금도 같은 제재를 가지고 시를 쓰라면 제가 경직 돼버리는 거예요. 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산문으로 쓰라면 내 마음이 편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그니까 같은 글을 써도 굉장히 자유스럽게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내 글의 ‘산문성’이구나, 라고 생각했죠.

 

내가 시를 쓰면 나 스스로가 경직되기 때문에 시를 안 쓰는 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지금도 저는 시를 즐겨 읽고 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시는 말하자면 저에게 사물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발상과 인식의 태도를 가르쳤고 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표현의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지금도 많은 것들을 시로부터 배우고 시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경직된 줄 알았더니 시인 대부분도 경직된 태도더라고요. ‘장르’에 경직돼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시를 읽으면서 제 생각으로는 백 명의 시인이 있다면 진정한 시인은 5%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머지 95%는 다 나처럼 경직돼있는 시들을 쓰더라고요. 말하자면 어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거죠. 장르의 매너리즘에 빠진 거죠. 95%는 가짜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가짜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학 전체가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그렇고 다른 모든 장르가 장르의 형식에 얽매어 너무 경직돼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 문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진짜가 많이 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문이나 수필이 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이게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것이 첫 번째 제 산문성이고 저의 이야기입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것. 그리고 제 글의 비유는 그 독창성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정성’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비유는 결국 A를 B에 빗대는 것 아닙니까? 즉 A에서 B로 감정이 이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감이 되고 결국 공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비유는 감정이입의 능력입니다. 즉 내 마음에서 끓어 넘치는 (spontaneous overflow) 진정성이 없다면 궁극적으로 비유도 없고 공감도 없다는 겁니다.


두 번째, 굳이 ‘미학’이라는 말을 붙이자면 제 글의 미학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어떤 ‘상징성’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자면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에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저도 시적인 글을 쓰면서 거기에다 아주 사소하고 미약하지만 이야기를 꼭 집어넣습니다. 작은 이야기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집어넣어요. 때로는 전혀 ‘이야기스럽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라고 못 느끼실지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이야기를 집어넣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야기 속에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징은 중요한 문학적 장치라고 보거든요. 그런 부분을 소설에서 많이 배웠어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 ‘셔우드 앤더슨’이라는 미국 작가입니다. 이 사람 소설집에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라는 단편소설집이 있어요. 오하이오 주의 가상의 도시 ‘와인즈버그’에 스물네 명의 인간을 등장시켜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거예요. 각종 괴기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그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 하나하나가, 하나의 상징성이더라고요. 예를 들자면 ‘손’이라는 단편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항상 자기 손을 감추는 거예요. 뒤로 감춘다거나 사람들 앞에 나설 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닌다거나 이런 식으로 항상 손을 감추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 손은 매우 아름답고 섬세한 손입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숨어 살아요. 혼자 있을 때 어떤 일을 즐기냐면 방바닥에 콩을 뿌려요. 그걸 손으로 줍는 거예요. 손으로 콩을 줍는 게 너무 민첩하고 아주 아름다운 동작이에요. 새가 모이를 쫓는 거보다 더 빠르고 민첩하게 그 콩을 줍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그 행위를 즐기는 거예요. 왜 저 사람은 손을 숨기고 혼자 있을 때 저런 행동을 하는가, 그게 중요한 상징이거든요. 그 사람이 어떤 과거가 있었냐면 원래 저 같은 고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아이들을 굉장히 사랑하는 거예요. 남학생을 가르치는 남고 교사였는데 남학생들을 자꾸 손으로 만지는 거예요.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머리도 만지고 손도 만지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만지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오해를 받느냐면 요즘 말로 하면 성추행이 되는 거죠. 성추행으로 오해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밤에 횃불을 켜 들고 교사 집으로 찾아가요. 그 교사에게 린치(lynch)를 가합니다. 그러면서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너를 죽여버리겠다, 손을 도끼로 찍어버리겠다, 당장 마을을 떠나라. 교사가 추방을 당하고 일생동안 사람을 피해 숨어 살면서, 손을 감춘 거예요. 제가 판단할 때 그 이야기에 어떤 상징성이 있는가, 선생님들 각자 생각하는 각도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성이 문란해졌잖아요, 우리 사회가. 어쩔 때 보면 남자들은 전부 성범죄자 같이 보여요. 남자들이 불쌍하게도 보이고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생각도 들고. 성이 문란해지고 성에 관한 우리 가치판단이 전도되면서 진정으로 사랑이라고 했던 것, 우정이라고 했던 것, 이런 것까지 성추행, 성도착으로 몰리고 있지 않은가, 그 작가는 일찍이 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에 의해서 인간의 진정한 가치, 사랑과 우정이라는 진지한 가치가 묻혀버린 사회, 이것에 대한 상징으로 그 글을 쓰지 않았나.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제가 동료 수필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제일 감탄한 게 선생님들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는 거예요. 본인 내면의 이야기, 본인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절실하고 호소력이 있어요. 몇 번 나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 절박한 이야기를 이렇게 숨기지 않고 쓰고 싶다, 이런 느낌도 많이 받거든요. 근데 결정적으로 문제는 뭐냐면 우리의 이야기에 상징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문학적 보편성이 없다는 거예요. 본인에게는 아무리 절박하고 슬픈 이야기고 심각한 이야기라도 상징성의 결여 때문에 문학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수필이, 이런 느낌을 저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라는 것은 허구에 대한 상상력이 없어요. 이야기를 꾸미라고 하면 못 꾸미겠대요. 도저히. 그리고 나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마치 그 사람들의 캐릭터에 빙의 되어서 그 사람들 내면을 들여다보듯이 그 사람들의 심리 묘사를 하고 그 사람 성격 묘사를 하고 그 인간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파노라미적인 서사를 전개하고, 이런 상상력이나 능력을 보면 저는 감탄스러울 뿐이에요. 이 사람 진짜 천재구나.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들을 제가 경외하는데, 그들은 백 매, 이백 매, 천 매를 써내는 거예요. 자기들 스스로 소설가는 ‘노가다’다, '글감옥'이다,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삶을 포기한 사람들 같아요. 글을 쓰기 위해서. 이렇게 저는 도저히 못쓰겠더라고요. 그래서 일찍이 소설을 포기했어요. 저는 문학이라는 것을 어두운 길을 갈 때 들고 다니는 렌턴 정도, 동반된 지팡이 정도로 생각하지, 문학으로 나를 불태워버리고 내 삶을 바쳐버리는 그런 천재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소설 쓰기는 일찍이 포기는 했지만, 소설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문학적 상징성 이것은 저희가 항상 배워야 하고 우리 수필에도 그런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에서 상징성이 그냥 상징성으로 끝나느냐, 아, 이 글은 이런 상징성이 있구나,라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게 시대상을 반영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해만 해서 그 상징성이 우리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저는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거든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상징 내에 깔린 더 중요한 문제가 뭐냐, 그 이야기를 읽을 때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거예요. 학교 선생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 속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깔려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상징성이 가치가 있는 거고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필이나 소설뿐 아니라, 글을 쓸 때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그건 글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글을 쓰는 것이고 그 글이 호소력이 있는 것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저도 언제부턴가 갈수록 마음이 삭막해지고 나이가 들수록 이기적이 되고 인간에 대해 폐쇄적이 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그만 써야 하겠다, 내 글에도 위기가 온 모양이다,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어지면 그 길로 저는 글을 접으려고 합니다. 글에서 가장 기본 된 것이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렸는데, 왜 우리가 시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비유인가, 여기서 시라는 것은 시라는 하나의 좁은 장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의미에서 문학 전체를 대변하는 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든 문학은 시를 지향하고 있다고 봐야 해요. 제 개인적인 판단이 그렇습니다. 모든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시에 한 마디로 ‘비유’입니다. 거기서 아름다움이 발생합니다. 그 비유가 발생하면서 감정이입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까마귀를 볼 때 까마귀에 내 쓸쓸한 감정이 이입되는 거예요. 그게 비유거든요. 감정 이입이야말로 모든 문학과 예술의 원동력이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시를 지향한다. 감정 이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교감을 일으키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교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경직된 시들은 시 세계가 너무 심오하고 너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나 비유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뭔가 엄청난 비유를 동원해야 한다, 엄청난 것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 거, 높은 정신세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립니다. 엊그저께 시를 읽는데 ‘저물에가는 새벽의 거대한 궁둥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새벽에 어떻게 저물어가느냐, 새벽에 궁둥이란 게 뭐냐. 어떤 이미지가 안 떠오르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뭘 표현하려고 그런 거냐. 그 시는 뭔가 위대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시가 난해해진 겁니다. 그래서 시가 대중을 잃어버린 거고. 문학이 대중을 잃어버리게 돼요. 저는 우리 수필이 그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성과 대중을 찾는 것이 우리 수필가들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이입이나 비유에 가장 큰 생명력은 제 마음에서 넘쳐 흘러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서 넘쳐흐르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감정이입이 되겠어요. 아무리 기발한 비유를 동원한다 해도 그것은 감정이입이 아닌 거예요. 그건 시가 아닌 겁니다. -- 유명한 말 있잖아요. 저절로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거야말로 진실한 감정 이입이고 진실한 비유라고 봐요. 제가 시인이 못 되는 것은 저절로 흘러 터져 나오는 감정의 분출이 10년 만에 한 번씩이나 되는 거예요. 그때 정말로 내가 시다운 시를 썼구나, 그러나 그것도 긴 시가 아니라 한두 줄 밖에 안되는 ‘하이쿠’ 같은 거예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시인이 되겠어요?

 

상징이 생명력과 호소력을 갖추려면 가장 중요한 게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유, 감정이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입니다. 사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할 때 진정성이 없는 글은, 진정성이 없는 비유는, 그런 감정이입은 가짜에요. 그리고 어떠한 전달력도 없고 교감도 못 일으킵니다. 저희가 글을 쓰는 이유가 감정이입을 시켜서 감동을 주고 상대와 교감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자연과 교감을 하고 인간과 교감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진정성이 없는 글은 그런 교감이 안 일어나요. 저는 그러한 ‘진정성의 미학’을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지요. 저는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하지요. 제가 만약 팔십 몇 세까지 산다면 20년 정도는 글을 쓸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아직 절망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 이십 년 동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학을 한 걸음 한 걸음 완성해나가겠다, 그런 각오로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전 늦지 않았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바둑을 좋아하는데 바둑 티브이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반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접전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바둑 보기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제 고향 사람의 아들 중에 ‘박종환’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최고의 천재 기사거든요. 박정환이가 열아홉 살 먹었을 때 ‘잉창지배’ 결승에 도달하게 돼요. ‘잉창지배’가 세계에서 가장 상금이 많고 가장 명예로운 대전이거든요. 온 국민이 기대하고 들끓었죠. 저도 한판 한판을 손에 땀을 쥐며 관전을 한 거에요. 상대가 17살 먹은 ‘판팅위’이라는 중국 소년이었어요. 17살 먹은 애가 세계기전의 결승에 나온 겁니다. 우리 17살 때를 생각해봐요. 아무것도 아닌 소년들이에요. 근데 얘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잉창지배에 도전을 하는 거예요. 결국 5국에서 19살 먹은 박정환이가 17살 먹은 소년에게 져 버린 거예요. 저는 그 이후로 바둑을 안 봐요. 그때 너무 상처를 받아서. 17살 먹은 애가 최정점에 이르는 이게 도대체 뭔가. 일본인들은 바둑을 예술이라고 본대요. 바둑을 도라고 본대요. 이게 과연 예술이며 도인가. 17살 먹은 소년한테 20년 30년 바둑을 둔 연조 깊은 선배들이 두 점 세 점으로도 안 될 정도로 비참하게 깨지는 이 바둑이란 게 이게 무슨 도고 이게 무슨 예술이냐, 이런 회의감이 듭니다. 어떤 분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시인은 21살에 죽어야 하고 혁명가하고 로큰롤 가수는 스물네 살에 죽어야 한다. 나머지는 뭐란 말입니다. 60년 넘게 산 우리는 뭐에요. 스물한 살에 최고조에 달하는 게 이게 진정한 예술일까요? 수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수필은 60세에 시작합니다. 80세 90세 가서 완숙해지고 어느 정도 경지가 보이는 게 수필이에요. 이게 진정한 예술 아닐까요?


그 다음에 제 나름대로 정리한 세 번째 미학은 역설과 반전의 미학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수필에서도 많이 느끼는 건데, 수필의 미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이 ‘역설과 반전의 미학’이란 생각이 들고요. 왜 역설과 반전의 미학이 중요한 거냐, 사실 논리적인 거거든요. 역설과 반전은 감성적인 거라기보다는 이성적인 거고 논리적인 거예요.


수필이라는 것이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잖아요. 거의 모든 글이 수필에 포함될 정도로. 그래서 제 생각으로 이런 글은 수필의 범주가 아닌 것 같다 하는 것들까지 다 수필의 범주로 포함을 시키더라고요. 흔히 말하는 논리적인 글들은 저희의 폐부를 찌르고 지성에 호소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삶의 지혜까지 가르치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리적인 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전문가들이 써야 합니다. 자기 전문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런 분들이 써주셔야 해요. 전문가들이 쓴 그러한 글들은 지금도 먹힙니다. 주류 언론에서도, 신문이라든지 매스컴 같은 데서도 논리적인 글, 전문가들이 쓴 글에 대해서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김종완 선생님께서 ‘산문 시대의 도래’라고 말씀하시는 거 있죠. 이미 시와 소설의 시대는 갔고 산문의 시대가 왔다 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에 일부는 공감하고 일부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지금 대중들에게 먹힐 수 있고 대중들이 선호하고 찾는 글은 산문 중에서도 전문가들이 쓴 글이에요. 전문가들이 글을 쓰면 대중들이 환호하고 뭔가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습니다. 그 사람들한테는 진짜 ‘산문 시대’가 온 거에요. 나를 돌이켜봤어요.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한 분야에서도 전문가였던 적이 없어요.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그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너무나 공감하고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부패하고 역겨운 세상에서 이렇게 날카롭게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칼럼을 쓰고 싶다, 이런 충동이 많이 사로잡히거든요. 근데 내가 칼럼을 쓰고 논리적인 글을 썼다고 할 때 누가 내 글을 읽어줄 것인가. 나는 아무 전문가도 아닌데. 내가 수필가라는 명칭을 가지고 그런 글을 썼다고 할 때 누가 나의 전문성을 이해해주고 나를 전문가로 칭해줄 것인가. 수필가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그 부분이에요. 우리하고 그 사람들하고는 같은 산문을 쓰더라도 전혀 다른 차원의 수필을 쓰고 있고 그 사람들은 글을 정신과 의사라든가 동양사 교수라든가 하는 전문성을 가지고 써요. 또 사회 평론가라는 전문성을 갖고 있어요. 저널리스트란 전문성을 갖고 있고요. 하다못해 여행 전문가라는 전문성을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거기서 많은 정보를 얻고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한테 나는 수필가로서 그런 논리걱이고 전문적인 글을 쓰겠다고 하면 그것은 마치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직업을 말해보라고 할 때 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직은 우리 수필은 전문성을 못 얻고 있다는 것, 우리는 아직 수필의 전문성을 인정 안 해주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전문가의 글을 쓰려면 여러분이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수필가로서 전문적인 글을 쓴다고 한다는 것은 직업을 말하라 할 때 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와 똑같아요. 정말 그런 글을 쓰고 싶고 그런 글로 나를 알리고 싶고 그런 글로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다면 전문성을 먼저 획득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글을 쓴다면 그 글은 모방에 그치고 아류에 흐르고 맙니다. 전문적인 글을 쓰려고 하기보다는 지성적이고 예술적인 수필을 써야 하시는 겁니다. 제 주관적인 생각은 그거에요. 그런 류의 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수필가가 어떤 분들이냐면 여러분들이 다 읽으신 책이겠지만 ‘쏘로우’가 쓴 ‘월든’ 같은 수필책이에요. ‘몽테뉴’가 쓴 ‘수상록’, 기독교 서적 중에서 ‘토마스 아 캠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이 있어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같은 산문집은 어떤 소설 어떤 시도 못 따라와요. 아주 높은 문학성을 지니고 있어요. 논리적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풍미가 있어요. 여러분이 그러한 글을 쓰신다 해도 적어도 시정신이 살아있어야 해요. 시의 풍미가 있어야 해요. 제가 그런 글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시적인 풍미 때문인지도 모르죠. 저도 제 능력이 닿으면 더 노력해서 그렇게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수필을 쓰고 싶어요. 문제는 반전과 역설의 미학은 논리적 사고에서 발원한다는 겁니다. 우리 수필가들은 논리적인 글에서 반전과 역설의 미학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는 사고의 패러다임 안에 갇혀 있잖아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물질만능주의 사고에 묶여 살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사고가 국한돼 있는 거예요. 물질적인 가치에 우리 사고가 묶여있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한 시 정신을, 문학 정신을 구현하려면 그런 패러다임을 깨야 해요. 알게 모르게 젖어있는 사고의 패러다임을 깨야 하거든요. 그래야 진정한 문학 정신이 살아나는 거에요. 그 패러다임을 깰 수 있는 힘이 뭐냐, 그걸 저는 논리라고 하는 거고 그 논리가 우리 수필에 적용될 때 뿜어내지는 미학이 뭐냐면 역설과 반전의 미학입니다.


가난이라는 거 추악한 거에요. 누가 뭐래도 가난한 건 추악하고 불편하고 혐오스럽고 비참한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어느 날 야산에서 피는 진달래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길어봐야 3일이거든요. 진달래가 만개해서 빛을 발휘하는 시간은 3일 정도, 365일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진달래가 어디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냥 숲 덩굴에 가려져 있고 전혀 존재감이 안 느껴지는 비참한 꽃입니다. 연약하고 하찮아서 무더기로 피어야 겨우 아름답다는 걸 인식하죠. 그런 꽃이지만 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냐면 가난한 것도 어느 한때는 빛날 수 있구나,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가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 생각엔 역설이라는 겁니다. 이게 반전이라는 거죠. 이게 있어야 우리는 물질 적 가치에 굳어있는 사고의 패러다임을 깰 수 있는 겁니다. 시 정신과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는 세 번째 미학입니다.


네 번째 미학은 ‘찌질이 미학’입니다. 자폐아 미학과와 거의 동일해요. 언젠가부터 제가 사는 이 세계가, 이 지구가 낯설고 두렵고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느낄 때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어머니가 새 모자를 사주실 때였죠. 모표가 있는 교모를 쓰고 첫 등교를 할 때. 모표가 반짝반짝 별 모양으로 빛나는 새 모자를 쓰고 너무나 기뻐가지고 이 세상이 전부 아름다운 음악에 휩싸여있는 듯한 기쁨을 안고 등교를 했던 거예요. 초등학교를 처음 등교한 날입니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제가 어떤 일을 당해버렸냐면 어떤 놈이 번개같이 달려들더니 내 모자에 모표를 빼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달아나버리는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삶이라는 것이 녹록한 것이 아니구나, 그때 처음 느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날 학교를 파하고 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데 그때 우리반 짱이라는 놈이 내 배를 아무 이유없이 때렸습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복도에 그렇게 30분 동안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내가 이길 수 없는 놈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세상은 너무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곳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삶의 본질은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구의 영혼을 인도할만한 ‘멘토’도 ‘구루’도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저는 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제 안의 ‘찌질이’를 달래주고 그의 영혼을 위무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저는 다른 ‘찌질이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영혼에 말을 건네고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 이 외롭고 우울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제 네 번째 ‘찌질이의 미학’입니다


제 글을 읽고 다시 생각을 하면서 제 나름대로 정리했던 것이 저의 문학관이고 저의 미학입니다. 앞으로도 일관되게 그 부분에서 노력을 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제 각오만은 그렇습니다. 사실은 수필이라는 것은 시나 소설이라든가 논리적 글쓰기 이런 것들의 틈바구니에 껴 있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시와 소설과 철학의 교집합 안에 끼어있는 틈새 문학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제 문학이 그 틈새에서 고사해버릴 거란 생각도 들어요. 누가 나를 알아주겠느냐, 제가 여러분들 앞에 한 달만 안 나타나면 다 잊어버릴 것이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는 슬픈 자괴감이 들어요. 너무 초라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들거든요. 언젠가 소설가가 쓴 시를 봤어요. 대가 소리를 듣는 소설가인데 그 사람이 시를 썼어요. 세상에 이렇게 위대한 정신이 시를 썼다고 하는데 이 정도 시밖에 못 쓰나? 상당히 좋아하는 시인이 수필을 썼더라고요. 읽어보고 드는 느낌이 이 정도 시인이 이 정도 수필밖에 못쓰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는 시나 수필을 못 써서 소설가가 된 것이고, 시인은 수필이나 소설을 못 써서 시인이 된 겁니다. 마찬가지로 수필가는 시나 소설을 못 써서 수필가가 된 것입니다. 각자가 제 능력 안에서 자신만의 인식체계와 표현방식으로 글을 쓰는 겁니다. 저는 수필을 쓸 때 마음이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스럽습니다. 수필은 모든 작위와 허위로부터 저를 해방시키는 저의 해방구입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저를 벗어나게 하는 저만의 탈출구입니다. 사회적 통념과 나의 가치관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저의 ‘문학적 딜레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