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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매일이 새날이다

by 안규수 2022. 3. 18.

                                                                       매일이 새날이다 / 안규수

 

 

         나의 취미는 여행이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자 역마살이 도져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딱히 어디 갈 곳이 마땅하지 않은 마당에 언제나 따뜻하게 품어 주는 한라산이 보고 싶어 제주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은 떠난 후보다 계획할 때가 더 행복하다.

  젊어서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아내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아내는 둥지를 못 떠나는 어미 새처럼 죽지로 삶을 끌어안고 꼼짝하지 않았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두고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게 집을 비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랬다.

  제주 절물 자연 휴양림을 홀로 걸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편백 삼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산림욕을 즐겼다. 오름 정상에 오르니 시원하게 트인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화구 능선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몸과 마음이 한결 상쾌했다. 여행의 묘미는 이 맛에 있다. 코로나 사태로 친구도 만날 수 없고 집에만 갇혀 있다 나선 길,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니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다. 그래서 여행은 웰니스이다. 웰니스는 육체, 정신적 건강의 조화로 즐거운 삶을 찾는 참살이에 건강, 행복을 더한 의미다.

  다음 날, 사려니숲길에 들어섰다. 편백 숲 정기를 마시며 걸으니 저만치 노루 한 쌍이 걷고 있다. 휘파람새도 경쾌하게 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아이 손을 잡은 젊은 부부도, 삼나무도 서어나무도 함께 걷는다. 마음의 문이 열리니 풍경을 통해 새로이 눈이 떠지고 모든 사물을 끌어안는다. 풍경을 사색으로 윤색할 수도, 한 곳으로 응집할 수 있어 좋다. 온몸으로 걸으니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이 벅차오른다.

  사흘째 되는 날 일출봉을 뒤로 하고 광치기 해변을 걸었다. 삶의 지혜를 품은 바다, 오늘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다. 하얀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 덮칠 듯 달려들어 깎아 지른 벼랑의 바위를 사정없이 때린다. 섭지코지에 다다르니 그곳에서도 파도는 검은 현무암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가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을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흰 거품을 입에 물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니 성산포를 사랑한 이생진 시인의 술에 취한 바다가 떠오른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바다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평생 가슴 속에 쌓인 세월도, 회한悔恨도 모두 다 토해내려는 듯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 신비의 일출봉이 가까이서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추상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구체란 말이 떠오른다. 어느 수필가는 이 느낌을 도상의 황홀경이라고 했다.

  나흘째에 산방산을 거쳐 대정 추사유배지에 들렸다. 완당 김정희선생의 유허遺墟지다. 추사의 개성은 한마디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끝없이 변화를 추구함에 있다. 말년에 추사는 자신의 노쇠한 얼굴을 그린 자화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 없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닐까. 늙어 독단에 빠질 수 있는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다. 세한도歲寒圖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잠시 머물렀다. 추사의 고결한 사의寫意 마음이 숙연해진다. 문인화는 그림 자체보다, 담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은가. 이곳에 9년 동안 위리안치되어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한결같이 인격과 지조를 잃지 않은 고귀한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곳자왈도립공원 숲길을 걸으니 가을이 저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쉼 없이 걷는 길이 곧 인생길이다. 걷는 길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몸은 피곤해도 상념은 사라지고 마음은 그지없이 호젓하다. 하나의 궤도에 어쩔 수 없이 실린 채 여기까지 왔다. 머릿속에 바람개비가 돈다. 그리움이나 회한, 이 모든 게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울창한 숲은 적막이 흐른다. 자연이 선사하는 자유로움, 도도한 변화에 인생무상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숲의 끈질긴 생명력은 겨울 문턱에 선 나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무한한 위안을 주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숲의 지혜가 경이롭다.

  ‘매일 작은 인생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나에게 매일이 새날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꿈보다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어린 지금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싶다. 육체는 노쇠해 가지만 정신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며 인생의 가치를 느끼는 때가 지금이고, 스스로 일궈 놓은 인생의 열매에 대한 반추의 멋을 음미할 때가 지금이다.

  홀로 걷는 길은 돈오頓悟의 순간이다. 깨달음은 삶의 중요한 바탕이자 지향점이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덧 희수喜壽인 나는 뜬구름 같은 인생, 그동안 어질지 못함에 후회가 가슴 깊이 파고든다.

 

  봄이 오면 언 땅을 비집고 새 생명이 움트듯. 삶에는 연습이 없다. 그 일회성은 경건하다. 어느 순간에도 멀고 험한 첫 길이고 돌아갈 길은 없다.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홀로 걷는다. 내가 걷는 한 매일이 새날이다. 스칼릿의 독백처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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