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사색/ 안규수
섬진강 매화가 막 꽃망울을 터트릴 즈음 제주를 찾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매서운 바람이 창을 할퀴고 있었다. 창문 밖 뜰 동백꽃 나무가 밤새 칼바람에 시달렸나 보다. 낙화의 꽃임에도 자기의 때가 아니면 꺾이고 베일지언정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티니 꽃샘추위의 몽니도 저 동백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춥고 힘들었던 겨울을 보냈기에 봄이 그만큼 소중하고 반갑다. 뜰을 걸으니 이 추위에도 겨우내 나목으로 서 있던 나무에 속잎이 돋아나고 봄의 왈츠가 경쾌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그 섬, 많은 길 가운데 올레길 1.2코스를 좋아한다. 종달이 해변,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라고 노래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 일출봉을 의연히 바라볼 수 있는 광치기 해변과 섭지코지의 매혹에 홀리어 그런다. 광치기 해변에 칼바람이 분다. 성산일출봉이 벌거벗은 채 모진 칼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한마디 투정도 없이 묵묵히 견딘다. 정승윤 작가의 산문집 「나 홀로 간다」에 등장하는 말(馬)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말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을까.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다.
사람들은 성질 사나운 바다라고 말하지만 기실 사나운 건 바다가 아니고 바람이다. 얌전한 바다를 충동질하는 바람, 세상 모든 움직임 뒤에는 바람이 있다. 때론 바람은 폭군이고 변덕쟁이다. 섭지코지 촛대 모양의 선돌 바위에 가마우지 한 쌍이 산더미 같은 물너울 파도가 삼킬 듯 덮쳐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가롭게 앉아있다. 그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험한 파도도 한발 물러서면 된다고, 삶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모래가 뺨을 따갑게 후려치는 길을 걸었다. 걷는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바람에 떠밀려 그냥 걷는다. 언덕 저편 바닷가 둔덕 위 억새가 모든 씨앗을 다 날리고 버석거리는 몸만 남아 바람에 나부낀다. 한여름 푸른 시절을 보내고 꽃을 피워 씨앗도 다 날렸으니 할 일을 다 한 억새. 이제 봄이 오니 새싹을 위해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한다. 문득 죽음 앞에서 호상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작은 풀꽃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칼바람도 넉넉하게 이겨내고 돌담을 기대어 활짝 피었다. 땅속에 몸을 숨기지 않고 땅에 납작 엎드릴 줄 아는 풀꽃. 홀로 걷는 날 보고 방긋 웃는다.
나는 바닷가 돌담길을 좋아한다. 그 숭숭 뚫린 구멍으로 불어오는 갯내가 묻은 바닷바람을 패 깊숙이 빨아드리면 체내에 쌓여 있는 독소가 한꺼번에 빨려 나간다. 새 한 마리가 돌담에 앉아있다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돌담은 엉성하게 보이지만, 그 틈새 바람구멍은 태풍에도 넉넉하게 돌담을 지켜내는 힘이 있다. 돌담은 화산성 바람이 함께 만든 대표적인 상징적 경관이다. 돌담은 자연미가 살아 있고, 부드러운 곡선에 정감이 간다. 돌담에서 섬사람들의 강인한 삶의 의지와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한라산백록담 남벽을 보기 위해 신들이 영역인 영실에 들어섰다. 이 코스는 내가 제주에 올 때마다 오르는 필수 코스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마다 전혀 새로운 풍광으로 나를 현혹한다. 붉은빛이 감도는 금강소나무 향긋한 솔향이 싱그럽다. 병풍바위에 오르자 깎아지른 절벽에 오백나한 기암괴석이 날 반긴다. 산허리를 감고 도는 선홍빛 햇살과 구름이 한데 어울려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고개를 넘는다.
구상나무 숲은 살아 있는 나무보다 죽은 나무가 더 많다.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생물 종이다. 그 나무가 모진 바람에 허리가 꺾이고 뿌리가 뽑혀 백골이 된 채 넘어져 있다. 이뿐만 아니다. 극심한 생육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인은 기후 온난화 현상 때문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한라산 침엽수 숲이 죽어가고 있었다.
윗세오름 주위에는 산죽인 조릿대가 산철쭉, 진달래 등 고유의 야생화 텃밭을 야금야금 점령하고 있다. 그 넓은 초원을 점령해 버린 조릿대는 다양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어느 시인이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 넘실거림에 묻혀 있으면 그만 미쳐버릴 것 같다’라고 노래하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천상의 화원이 조릿대 세상이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나는 ‘마이 웨이’로 여기까지 왔다. 인생이 어차피 홀로 걷는 길이요, 내 발이 삶이었다. 혹은 지름길도 걸었고, 멀리 돌아서 에움길도 걸었다. 에움길이 볼 것이 더 많았다. 꽃구경도 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듣고, 길과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걷고 걷다 보니 내 몸이 바로 움직이는 붓이요 펜이 아닌가. 이제야 알겠다. 글은 손으로 가슴으로 쓰는 게 아니라 오직 발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내 온몸이 붓이 되어 한 발한 발 힘찬 획을 그으며 걷다 보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되고 한 편의 수필이 되었다. 그것은 과거라는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산호와 진주를 캐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용눈이오름에 올랐다. 불덩어리 같은 저녁 해가 저 멀리 지평선 아래 커다랗게 걸려 있다가 떨어지며 석류꽃보다 더 붉게 서쪽 하늘을 물들인다. 곧이어 자줏빛 어둠이 죽음처럼 밀려온다. 어둠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슬픔에 잠겨 산에서 내려왔다. 나는 다음 날도 오름을 오를 것이다. 태양이 묘지 위에서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섬이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정작 변한 것은 섬이 아니라 내 모습이다. 그걸 느낄 때마다 얌전히 누운 바다 위로 가만가만 소름이 돋는다. 아니, 그보다는 묘지가 있고 솟아오르는 태양이 있는 한라산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리라. 끝없이 부침하는 생을 닮은 한라산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