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달, 3월 / 안규수
봄꽃이 한창이다.
팍팍하게 살다가도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곱지 않은 꽃이 없다. 잠시라도 봄 소풍을 다녀와야 할 분위기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설렘이 앞선다. 오래 객지에 머물다 가끔 귀향길에 나서는 나그네로선 그 경쾌한 발걸음이며 달뜬 심경을 무엇에 비기랴. 그런데도 고향이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진다.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던 무지갯빛 동심은 오간 데 없고, 골목은 깊은 침묵에 묻힌 적막강산이다.
마을 언덕에 자생하는 들꽃은 옛 모습 그대로 피어 있다. 순박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도 옛 모습 그대로 변함없다. 봄이 오면 잎새는 얼었던 땅을 비집고 나와 눈이 부시도록 대지를 푸른 새 생명으로 뒤덮던 쑥부쟁이, 강아지풀, 질경이, 안개꽃, 쥐오줌풀, 며느리 배꼽, 제비꽃 등이 그 주인공이다.
들꽃의 작고 질긴 생명력은 마을 사람들의 성정을 닮은 것 같다. 바우, 만덕이, 실겅이, 싹불이 등 어릴 적 동무들 이름에도 흙냄새와 거름 냄새가 물씬 베어져 있다. 이처럼 고향의 야생 꽃들은 모양부터 수더분하고 정겨워서 그런지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나는 이 냄새가 그리워지면 고향을 찾는다. 마을 우물가에 핀 쑥부쟁이는 검은 무명 통치마에 댕기 머리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소꿉친구 옥금 이를 연상하게 한다.
그 들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토종민들레이다. 몇 해 전 이른 봄날 지리산 상선암에 들렸을 때 계곡을 가득 메운 토종민들레의 노량 꽃이 꽃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외래종 민들레에 쫓겨 이런 깊은 산골에 숨어든 게 아닌가 싶었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도로의 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와 작은 꽃을 피우고 있는 민들레를 발견하고 감동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초라한 들꽃에는 어릴 적 추억이 아련한 빛으로 어려 있다. 닭장 풀도 마찬가지다. 마당 가 닭장 부근에서 자란다고 해서 닭장 풀인데 크기가 하도 작아서 애처롭게 보일 정도다. 그때 암탉 여럿을 거느리고 마당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수탉, 풀꽃의 선연한 자줏빛이 앙증스럽게 귀엽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3월, 아직 꽃망울을 못 터뜨린 목련도 적지 않는데 4월에 피는 벚꽃이 폈다. 진달래는 아직 펴고 있고 개나리꽃은 여전히 무성해지고 있다. 봄꽃은 대개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순으로 피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도 매화에서 벚꽃까지 한 달에 나눠 피던 꽃들이 요즘은 일주일 사이에 다 핀다. 남도에 벚꽃이 한창일 때 서울에서도 벚꽃 소식이 들려왔다. 산수유는 매화와 더불어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중 하나다. 구례 산동 산수유 축제는 예년에 비해 열흘이나 앞당겨졌다. 점점 빨라지는 기후변화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다. 지구의 온난화로 봄꽃 피는 시기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압착 되고 있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니 보기는 좋다. 그렇지만 꽃들이 정한 순서를 어기고 한꺼번에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은 시기가 어긋나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단다. 먹이사슬이 붕괴하면 자연의 질서는 무너진다. 아무래도 이 일을 두고만 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 빈번한 꿀벌 집단 폐사의 주범은 응애라는 진드기로 밝혀졌다. 응애는 벌통에 기생하면서 애벌레의 체액을 빨아 먹고 병원성 바이러스를 옮기는데 방제가 어렵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원인도 기후 온난화라고 한다. 종일 꽃들 위에서 잉잉거리며 부지런히 꿀을 모아 집으로 돌아가는 꿀벌은 하찮은 노동과 그 보람을 즐거워하는 인간에 대한 은유다. 인간은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꿀벌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꿀벌이 없다면 그건 곧 생태계에 혼란이 초래되어 재앙으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다.
지난 2년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생활환경을 바꿔버렸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지구 온난화로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 빙하가 녹아내리며 수만 년간 갇혀 있던 병원체가 봉인이 해제돼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이른바 '좀비 바이러스'의 습격이다. 어쩌면 코로나 균체도 이런 온난화의 저주의 서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마 전 조간신문에서 시베리아 야쿠츠크 지역의 영구 동토에서 약 4만 8500년 전 호수 밑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러스를 포함해 인류가 처음 보는 바이러스 13종을 발견했다는 보도를 읽었다. 토양이나 강은 물론 2만 7000년 전 죽은 시베리아 늑대의 창자에서도 발견된 이들 바이러스는 아직 충분한 전염력을 갖추는 상태라고 한다. 특히 얼어붙은 동물 내에 잠복하고 있다가 노출되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주목하고 있었다. 실제 2016년 러시아 북시베리아에서는 된더위로 영구 동토 빙하가 녹으면서 사슴 사체가 노출, 이와 접촉한 어린이 1명이 탄저병에 걸려 숨지고 성인 7명이 감염된 바 있다. 이 지역에서 탄저병이 발생한 일은 1941년 이후 처음 일이었다. 시베리아는 지구에서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 중 하나로 땅속에 얼어붙어 있던 유기체가 노출되는 일도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순천 동천 벚꽃 길을 걷는다. 수백 수천 송이 벚꽃이 햇살이 겨운 듯 잔바람에 너울거린다. 꽃눈이 내리는 언덕에서 하얀 꽃송이를 올려다본 순간, 황홀함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웬일일까? 이리저리 한참을 찾아봐도 벌과 나비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정작 눈부시게 찬란히 치장한 꽃이 기다리는 손님은 벌과 나비이다.
나무는 모든 조건이 제게 알맞았을 때 꽃을 피운다. 혹독한 북풍한설도 그 의지를 꺾지 못한다. 그러나 기후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에 꽃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잔인한 달, 3월이다.
하지만 찬란한 봄은 잠자는 내 안의 봄을 깨우고 있다. 그 봄이 영롱한 꽃 옷을 입고 내 앞에서 방긋 웃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서글픈 봄이다.
< *‘23 수필미학 가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