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산 꽃바다 / 안규수
초여름, 우거진 녹음이 산색을 온통 풀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젊어서 함께 산을 즐긴 친구 K, J와 셋이 강원 태백에서 일박한 후 태백과 정선의 경계인 두문동재(1,268m)를 향해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한때 열정을 투자하며 미친 듯이 산을 찾았었다. 산에는 도원경桃源境이 있었고 영원한 푸른 바람이 불기 때문이고, 그 이상향을 찾아 바람 따라 그리움 따라다닌 세월이었다.
두문동재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금대봉에서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국내에서 생태의 다양성과 식생이 가장 우수한 곳으로 평가받는 야생화 군락지다. ‘꽃바다’라는 별칭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들꽃이 피고 진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산행이어서 두 달 전 국립공원공단 예약센터에서 예약했다. 다른 팀이 섞인 여덟 명이 공원 해설사와 함께하는 산행이다. 매년 4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하루 500명에게만 허락된다. 두문동재에서 검룡소 주차장까지 전체 거리는 9.4km, 약 4시간 30분을 잡는다. 하지만 야생화 꽃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두문동재 출발 지점이 해발 1,200m가 넘어 날씨가 서늘하다. 길 주변에 자란 키 큰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듬성듬성 볕이 스며드는 나무 아래는 온통 녹색의 바다다. 가녀린 대궁에 노란 꽃을 감아올린 감자난초, 분홍빛 꽃송이 쥐오줌풀, 초록 잎사귀에 진노랑 꽃잎이 돋보이는 태백기린초 등도 눈길을 끈다.
숲은 어울림이다. 야생화는 잘 가꾼 꽃밭처럼 화려함을 뽐내기 보다 여러 들풀이 어우러져 건강함을 유지한다. 순천만정원에서 인공으로 조성한 꽃밭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비교가 안 된다. 자연미의 극치이다. 꽃송이가 탐스럽지 못하지만 앙증맞은 크기로 특유의 색과 향을 자랑한다. 숲에선 색이 곱지 못하거나 눈에 띄지 않은 식물도 홀대받지 않는다.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귀한 대접을 받는 야생화도 허다하다.
길잡이로 동행한 해설사가 어둑한 길섶에서 나도수정초를 발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꽃대와 꽃잎이 차돌처럼 반투명 흰빛이다. 이런 식물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자태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을 보니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지나간 삶도 아름답고, 현재도 아름답고, 남은 세월도 아름다울 거로 생각하니 허무한 것도 없고, 앞으로 그냥 보이는 대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도수정초가 오늘 내게 준 선물이다.
“숲을 가꾸고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과학기술이 우주까지 뻗어가는 시대라지만 늘 밟고 다니는 자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수준이다.”
자연 생태에 해박한 해설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처음 듣는 희귀종 꽃 이름을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고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다. 5~6월 손톱보다 작은 꽃을 피우는 대성쓴풀, 기다란 꽃대에 몇 개의 꽃이 드문드문 달리는 나도범의귀도 한반도에서 백두산 외의 태백산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라 한다.
두문동재에서 약 20분을 걸으면 금대봉과 고목나무샘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금대봉 정상까지는 급경사 오르막이다. 금대봉 정상을 포기하고 고목나무샘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탐방 예약 확인 절차를 거친다.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가꾸고 보존하기 위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노력이 가상하다.
내리막 능선에서는 일시적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백당나무와 고광나무 새하얀 꽃송이가 우거진 녹음을 배경으로 화사하다. 옛날 화전민들이 거주하던 산 중턱은 일본잎갈나무 조림지로 변했다. 나무 이름에 ‘일본’이 붙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화전민들이 소나무를 모두 베어내 민둥산이 되어 속성수인 일본잎갈나무로 조림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짙은 비구름에 나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 높이 쭉쭉 뻗었다.
이곳에서 내리막 피나무 쉼터를 지나면 분주령이다. 분주령은 태백과 삼척 산골 주민들이 오가던 길목이다. 이 산줄기는 태백 상사미동에서 삼척 도계읍으로 넘어가는 건의령과도 연결된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실권을 빼앗기고 삼척으로 유배해 온 뒤 살해되자, 그를 따르던 충신들이 관복과 관모를 벗어 던지고 태백산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진 유서 깊은 곳이다. 등반 출발점인 두문동재 명칭은 다시는 바깥세상에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신념의 표현, 즉 두문불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검룡소에서 대덕산 정상까지는 지나온 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파르다. 그러나 바위 하나 없는 푹신푹신한 흙길이라 한 걸음씩 옮기다 보니 어렵지 않게 정상이다. 이 구간에선 이미 꽃이 지고 있는 눈개승마 군락, 이름처럼 은은한 자태를 뽐내는 은대난초, 흑갈색 종 모양 꽃을 아래로 떨군 요강나물, 황적색 꽃잎을 곧추세운 날개하늘나리 등 희귀식물도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대덕산(1,307m) 정상이다.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인다. 마침 흩뿌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까지 파랗게 드러났다. 지나온 산골짜기로 안개가 바람 따라 이동하고, 제법 넓은 초원에는 이름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천상의 화원에 천상의 절경이 어우러진다. 고랭지 배추밭인 매봉산 바람의 언덕에서부터 함백산과 금대봉, 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선 백운산까지 태백의 산줄기가 우람하고 장엄하다.
대덕산 정상에는 제법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다. 현재 범꼬리와 전호, 수영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비가 그치자 태백 준령 사이사이로 운무가 일렁거리고 있다. 계곡까지 내려오면 검룡소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까지는 다음으로 미루고 온통 짙은 녹음으로 덮여 있는 검룡소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매봉산 능선에는 바람개비가 돌고, 그 산기슭에는 대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이 조성돼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고랭지 밭과 마을 풍경, 태백 준령이 한눈에 담긴다. 이곳에서는 맞은편 삼척의 우람한 산세도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운다. 특별히 국립공원 해설사님의 친절한 해설이 오늘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해 주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산 벗들도 몸은 피곤해 보여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참 오랜만에 맛본 꽃바다의 짙은 녹음과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하다. 온몸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오늘 산행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에세이스트 ’23연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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