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는데도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급속한 환경의 변화로 절기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여름 강우의 유형이 온대 지역 장마가 아니라 아열대 지역의 우기로 바뀌었다. 자연환경이 바뀌면 수천 년 이어온 정서도 바뀌게 마련일 터,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그 시절 배는 고파도 행복하다는 것, 먹고 살 만한 땅을 가진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오순도순 살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새벽 먼동이 터오면 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날이 밝았다. 아버지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엄마는 물동이를 이고 집 아래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부뚜막 위에 정수를 올리고 조왕신에게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으로 하루는 시작되었다.
그때 농부들에게는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라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는 퇴비를 만들기 위해 매년 들에 벼 이삭이 팰 때면 일군들을 데리고 마을 뒷산인 징광산 기슭 가파른 산길을 올라 풀을 벤 후 마르면 지게로 져날라 작두로 풀을 썰어 마당에 산더미 같은 퇴비를 만들었다. 그 퇴비 만드는 일은 풍년을 기약하는 동네의 연례행사로 거름 자리 크기는 곧 그 집 살림 형편을 가름하는 잣대였다. 퇴비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해거리’란 말이 있다. 과실이 한 해에 많이 열리면 그다음 해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 걸 말한다. 그때는 2모작이라 해서 논에 벼를 수확한 후 보리나 밀을 재배했다. 아버지는 4, 5년마다 벼를 수확하고 보리를 재배하지 않고 자운영을 심어 땅심을 높인 다음 햇벼를 심었다.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등 많은 과실나무는 해거리한다. 한 해 많은 열매를 키우고 나면 다음 해는 반드시 쉼이 필요했다. 한 해를 쉬는 건 나무들의 안식년이기도 했다.
2천여 평의 감나무에서 과실을 수확해야 하는 아버지의 처지에선 수확량 감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해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이 가지치기이다. 썩은 가지는 물론이고 잔가지를 미리 잘라 주면 이듬해 감나무 가지마다 둥근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해거리’와 ‘가지치기’는 ‘힘과 쉼’이다. 이는 자연이 베푼 비움의 지혜이다. 힘과 쉼 역시 그렇다. 얼핏 정반대 성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힘을 빼고 멈춘 상태가 ‘쉼’이기 때문이다.
나는 환경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또한 자연을 한 번 파괴하면 다시 회복될 수 없고, 자연은 인간에게 당한 만큼 반드시 갚아준다는 것도 안다. 1965년쯤, 우리 농촌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 덕분이다. 이때쯤 가난을 퇴치하자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심었다. 농부들은 다수확 품종이라는 말에 퇴비로 농사짓든 재래의 방식을 바꾸어 비료와 농약을 사용했다. 이때부터 힘들게 퇴비 만드는 일도 없어졌다. 이 신품종 벼가 전국적으로 재배되면서 쌀 수확량을 늘었으나 농촌의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면서 고향의 옛 정취는 사라졌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정 사회가 삭막한 메마른 사회로 바뀌어 갔다. 오직 다수확에 몰입한 까닭에 화학 비료와 농약 사용이 대폭으로 늘어났다. 특히 통일벼는 병해충에 취약해 농약 사용이 해마다 급속히 늘어났다. 바람 부는 날에는 하얀 농약이 독한 냄새가 집안으로 날아들어 숨쉬기조차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인분과 천연퇴비로 몇천 년 이어온 것이 화학 비료가 등장하고 땅이 다 망가져 버렸다.
그때 봄이 오면 농촌에는 남쪽 나라에서 제비, 오뚜기, 따오기 등 여름 철새들이 어김없이 찾아 들었다. 제일 반가운 손님은 제비로 사람들은 그 철새가 행운을 물고 온다고 믿었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전선 줄에 앉아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정겹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의 한 단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철새들의 먹이는 논밭의 해충이다. 과도한 비료나 농약 사용은 병해충만 잡게 아니라 철새들을 죽인 것이다. 해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그 철새들은 이 땅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웅덩이에서 헤엄치던 풍뎅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땅강아지, 가을이면 노란 황금 들판 벼 이삭에 붙어 깡충깡충 뛰어 날던 메뚜기, 새들을 쫓든 허수아비도 사라졌다. 오월이 오면 무논에서 밤새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고, 개울의 피리, 메기 등 물고기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 동물이나 곤충이 살 수 없는 이 땅에 사람인들 온전할까.
엄마는 유월 뽕잎이 무성해지면 해마다 누에를 쳤다. 가랑비 이파리에 부딪는 소리처럼 들리던 뽕잎 갉아 먹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내 유년의 나이도 누에처럼 허물을 벗곤 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나는 달콤한 오디를 따먹었던 그때, 해마다 유월이 되면 마음은 늘 뽕밭에 가 있었다. 즐겨 부르던 동요 ’따오기‘ 도 오디도 기억의 저편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은 자연 일부이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싸리 울타리에 소변을 누다 미루나무에 걸친 달을 보면 멀미 나던 새벽녘, 일그러진 달을 보고 놀란 강아지 짖는 소리에 닭들이 꼬끼오하며 새벽을 깨우던 사람 냄새나는 그 풍경이 그립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강강술래를 부르고 춤추며 풍년을 기약했다. 그런 멋이, 젊은이들이 사라진 농촌 마을 골목은 싸늘한 늦가을 바람에 낙엽만 휘날릴 뿐 적막한 산중이 되어 가고 있다.
“엿 사 시어, 엿 사” 엿장수의 우렁찬 가락이 이울고, 잔 햇살 한 줌씩 쥐고 고샅같이 휘어진 세월은 가고 없다. 짭짤한 정이 곰삭아 있는 빈집 울타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이파리 하나를 톡 떨어트린다. 자연의 소리이며 사람 사는 소리다. 자연에 허기진 내 고향길을 걸어서 가고 싶다. 내 혼이 거기 있으므로 나는 혼자라도 터벅터벅 걸어가겠다. 아름다운 고향이 날 기다리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