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날의 풍경 / 안 규수
그리운 시절은 여름에 있다. 여름이 젊음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운 한라산, 한라산 곶자왈 숲길은 나의 숨은 사랑이다.
섬, 제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이름이 참 예쁘다. 그중에서도 여름은 특별하다. ‘름’이라고 발음할 때 혀가 입천장을 부드럽게 스친 후 입술이 닫히며 마무리되는 일련의 움직임이 좋다. 이 발음이 여름이라는 계절의 푸른빛과 잘 어울린다. 자연은 사계절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기이하다. 그 균형은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라산 곶자왈 숲을 좋아하게 된 건 20여 년 전부터다. 올여름은 지구 곳곳이 홍수 산불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불쾌지수가 치솟는다. 나 홀로 새벽 1시, 여수에서 배편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섬을 찾았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연례행사처럼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치유의 숲’에서 서성이곤 한다. 무엇인가 가슴에 차오르는 생의 충만감을 누르며 푸른 숲길을 즐겨 걷는다. 나무는 심긴 그 순간부터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선택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고 푸르러야 한다.
조그마한 언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이 다소 곳 피어 있다. 꽃은 숲에서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듣고 자란다. 달빛과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꽃이 저절로 피는 것처럼 보여도 엄동설한의 긴 겨울을 이겨낸 뿌리, 줄기, 잎이 없었다면 어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런 꽃의 속성에서 세월이라든가 우리네 삶까지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의연한 들꽃의 초탈 자유를 읽는다.
문학이라는 생소한 길을 선택한 지 어언 10여 년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가고 싶었던 길이긴 하지만, 아직 덜 익은 홍시이다. 게다가 글을 쓰면서 실제 나의 모습이나 행동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가면을 쓴 채 글 뒤에 숨거나 흉내만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그런 내게 들꽃은 나직이 속삭인다.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싶으면 껍질을 벗고 초탈하라고.
숲은 짙은 정적이 흐르고 있다. 한낮의 숲은 시간이 잠시 정지되어 있다. 울창한 활엽수림이 내 뿜는 싱그러움에 매료되어 행복에 겨워했다. 배낭에 김밥 한 줄, 오이 한 개, 물 한 통을 넣고 숲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내 옆자리가 비어 있다. 누구라도 곁에 앉아 주면 좋을 듯싶다. 거기에 이왕이면 보고 싶은 사람이 앉아 준다면 더욱 좋겠다.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 풋풋한 봄나물 같은 남녀대학생들, 늙은 부부가 다정히 지나가고 있었다.
이 의자에는 가슴이 뭉클한 사연도 묻어 있다. 코로나 이전 이맘때 이곳에서 만난 40대 젊은 부부, 초췌한 모습의 아내가 자궁암 수술받고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이 근방 마을에 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낮이면 이곳 숲에서 지낸다고 했다. 아내는 집에 두고 온 두 아이가 보고 싶다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직장도 휴직하고 이 치유의 숲에서 아내를 기어이 회복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정성껏 돌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어디 있을까.
숲은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이다. 해님이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 울창한 숲 여기저기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이 지저귄다. 새들의 노래가 맑고 경쾌하다. 마치 교향악을 연주하듯 묘하게 화음이 어울린다. 가만히 보니 새들이 날 더러 실컷 한번 울어 보라고 토닥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에 내 손을 잡고 들길을 걷다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너, 뭣 헐라고 태어났냐?” 하시던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날 밤 달빛은 엄마의 아픈 상처에 담긴 한恨의 은유였다. 나는 우는 한 마리 새였다.
숲의 노래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자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 무엇을 숨기지 않고 순수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야 언젠가 평안한 마음으로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을 것 같다.
성산 삼달리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들렸다. 제주를 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은 무거운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오름과 바닷가를 누비면서 렌즈를 통해 그 짧은 순간의 황홀을 찾아 헤매고 그 순간을 영원 속으로 소환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한 건 섬사람들에게 영원한 이상향인 ‘이어도’이다. 그가 처음 섬을 찾았을 때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관광지로 변모해 가면서 하나둘 태곳적 신비는 사라지면서 이상향도 잃어 갔다. 어느 날 용눈이오름 입구에 전신주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는 낙담했다. 그가 추구하던 황홀의 순간을 더 이상 사진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맘때 선작지왓 평원에서 일순간, 안개에 묻혀 있던 백록담 남벽이 눈이 부신 햇살을 받으며 홀연히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평원에는 세찬 바람에 선홍색 구름이 원을 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광경은 잊을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운다. 길게 뻗은 한라산 능선 붉은 노을이 더없이 아름답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길이 가볍다. 숲이 내 안으로 가만히 걸어 들어온 게다. 집에 두고 온 아내에게 하루의 일정을 보고했다.
“아니, 하루 종일 숲에서 누구랑 놀다 왔어, 솔직히 말해?”
아내의 감感이 맞다. 이 일을 어쩌랴. 내일 또 숨은 사랑을 찾아 동백숲에 갈 건데.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어둠에 멱살 잡혀가는 나. 짙은 외로움이 온몸을 감싼다.
나는 섬 숲에 숨어 있는 매혹적인 사랑을 찾아 오늘도 헤맨다.